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시래기
'글. 최명임'

밭고랑에 무청이 널브러졌다. 엽록이 생생하다. 몸뚱이에 미처 내려 보내지 못한 양분을 머금고 풀이 죽었다. 박토에 뿌리내리고 한철 몸 불리느라 고단했을 텐데. 못 다 쓴 기운을 안으로 말고 시류에 몸을 맡긴 채 말이 없다. 허우룩한 모습을 끈으로 엮어 뒤란 처마 밑에다 걸었다.
없는 듯 있는 듯 두었다가 어느 날 보니 한 점 물기도 없이 말랐다. 언제 푸른 적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을 만큼 무채색으로 바래었다. 마른 몸 어디에 진액이 들어있다니, 한때 그 울력으로 사람의 허기를 껴안고 허우적거렸나 보다. 삶의 알알한 조각들 넉넉하게 꿰매어 놓고 빛바랜 모습으로 앉은 어머니처럼.
한때는 어머니도 조선무의 날개처럼 풋풋했다. 피붙이를 품기 시작하며 종일 볕도 모자라서 달빛과 별빛도 받아 마신 푸른 무 잎이었다. 가을이 다 가도록 따가운 볕에 몸을 굴리고 겨울밤엔 불러오는 배를 끌어안고 베틀 위에 앉았다. 씨실과 날실로 아귀 맞추어 희망을 짜다보면 동이 훤하게 터 왔다.
삶인데 눈물 나는 날이 왜 없었으랴. 황소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동여매어도 옹색한 초가엔 늘 가난이 복닥거렸다. 아버님이 일본으로 징용당한 뒤에 시 숙부님 한 분도 시류에 떠밀려 어디론가 떠났다. 남은 한 분마저 휑한 가슴을 주체 못해 밖으로 나돌았다. 어머니는 돌림병으로 피붙이를 잃고 핏물이 새는 가슴을 동여맨 채 식솔을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맺힌 마음 쏟을 때마다 희멀건 시래기죽을 들먹인다. 먹는 것이 전쟁이었다고. 또 한 번 난리가 났을 때 온 식구를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몇 십리를 걸어 청산마을 동구로 들어서는데 텃밭마다 살진 무가 허옇게 나뒹굴었다. 방 한 칸 동냥해서 식솔들 디밀어놓고 밭으로 들어갔다. 허겁허겁 일 도와주고 무와 무청을 한 아름 얻었다. 동네 밭을 돌아 푸성귀 이파리를 줍고, 난전 파장에서 이삭을 주웠다. 처마를 두고 온 어머니는 모은 푸성귀를 남의 집 담장에 얼기설기 널었다.





진눈깨비가 을씨년스럽게 뿌리는 날 피붙이들이 온다는 기별이 왔다. 시래기로 뼈가 굵고 어머니 눈물로 살을 찌운 세대들이다. 어머니가 당신의 처마 밑에서 잘 마른 시래기를 걷어 내린다. 초로에 든 피붙이들이 오는 족족 불목에 발을 디밀고 이야기 푸지다. 그 사이 시래기 질기디 질긴 결을 풀기가 어려워서 소다 한술 넣고 푹 삶아낸다. 쌀뜨물 넣고 멸치 몇 마리 띄워 시락국을 끓였다. 피붙이들이 알알한 냄새를 들이켜며 추억을 불러들였다. 뒷맛이 씁쓰레한데 시락국이 조곤조곤 속을 풀어내었다. 어머니와 시래기 애틋했던 사연들이 구수한 시락국에 피어나는 저녁참, 진눈깨비가 멎은 방안에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정겹다.
시래기는 쓰라린 맛의 대명사였다. 보채는 허기를 채우며 흘린 눈물 맛,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맛이었다. 시절과 사람이 함께 허덕이고 내 것이 내 것이 아니었던 때, 식솔들의 목숨 줄을 잇느라 허우적거렸던 어머니 맛이었다. 시래기가 속도 없이 허기만 채운 것은 아니었다. 거친 결에다 햇살을 쟁이고 양분을 녹여 담아 자식들의 뼈대를 키웠다. 가난에 찌든 혈액을 맑게 거르고 질긴 근성을 가르쳤으니 그 대단한 힘들을 바탕에 두고 반도의 뼈대가 이리 굵은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가난을 꿰던 시래기 같은 존재였다. 시래기가 어디 만만했던가. 마지막 보루인 양 뒤란에 걸렸다가 허기진 뱃구레 채우던 구황방이 아니었나. 시절 이야기할 때마다 어른들의 입에서 볼가지는 이 정겹고 아릿한 뿌리 식물, 허리를 동여매고 없는 집 부뚜막을 몸에서 단내 나도록 드나들었다.
뿌리 식물은 오로지 뿌리만 불린다. 양분을 뿌리에 저장하느라, 해가는 줄 모르다가 밤이 오면 달빛 한 숨, 별빛 두 숨 받아 마신다. 허연 뿌리가 가을을 박차고 나와 존재의 빛을 발하면 비로소 한숨을 뱉는다.
정작 이파리는 버린다. 햇살과 바람은 다시 한 번 눅진한 이파리의 생에 간섭을 시작한다. 시들고 말라야 완성되는 또 하나의 생, 초록물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몸이 뒤틀려오는 통증을 참아낸다. 진액마저 다 내어주고 떠난다. 버린 것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 다른 무엇이 되어 돌아오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환의 구도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자연으로 돌아간 것은 거름이 되어 종아리만 한 무로 영글고 그 이파리는 또 시래기가 된다. 버린 것들은 무엇이나 자양분이 되어 햇살 더불고 그들의 새 생명을 살찌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우리에게 비바람은 왜 그다지도 울컥울컥 드나들고 파랑은 또 울면 불면 일었는지.
올겨울, 시래기가 피붙이들의 속을 따스하게 데웠다. 내년 가을도 소소리바람이 불고 밭고랑에 무가 뒹굴면 버려진 이파리를 꿰어 엮어야겠다. 줄기 하나 툭 분질러 보면 남아있던 하얀 해물이 쏟아지고 달빛과 별빛 한 줌 쏟아질 것 같은, 저 푸른 아쉬움을 처마 밑에 걸어놓고 어머니를 보듯 나의 삶을 바라보리라.
세상에는 아낌없이 주고 가야 하는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래서 해는 지고도 변함없이 뜨고 비도 우주를 돌고 돌아 절절하게 내린다. 사는 동안 계절 따라 바람이 달리 불고 햇살은 중천에서, 달과 별은 하늘을 돌아 밤새도록 빛났으니, 너와 내가 우리가 있는 것이다.
처마 밑에 누렁이가 나른한 꼬리를 뒤척이다 고개를 박는다. 업구렁이도 깊은 잠에 들었다. 빈 남새밭의 여운이 길게 드리운 한낮, 늙으신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졸음에 겹다. 볕이 종일 머물다 갔다.

EDITOR 편집팀
최명임 작가
이메일 : cmi3057@naver.com
2014년 문학저널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내육문학회원 /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필진(전)
청주교차로 신문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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