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 여행]
왕비의 꿈에 나타난 구루물 돌부처-1부
'숨겨진 운천동 이야기- 구루물 산책'

‘구루물 산책’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여행]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행본입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천동의 숨겨진 다채로운 발굴 이야기를 흥덕사지를 발굴한 지역 전문가를 통해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엮은 책입니다.
Cheapter6. 왕비의 꿈에 나타난 구루물 돌부처
옛 구루물 즉 운천동의 본 마을이었던 지금의 사직1동 무심천 제방 옆에는 용화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500여 점의 청동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어 유명해진 사뇌사(思惱寺) 터이기도 하다. 용화사의 법당에는 청주에서 제일 큰 돌부처들이 모셔져 있다. 보물로 지정된 용화사 석조불상군이다. 예전엔 용화사 칠존미륵불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한 법당에 모시기 위해 일시에 조성한 것이 아니어서 여러 석불이라는 의미로 문화재명칭을 석조불상군이라 하였다. 현재는 용화보전에 거대한 불상 3구를 모시고 4구는 동편 극락전에 따로 모시고 있다.
이 돌부처들은 언제 어느 절에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문헌기록에 일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운천동에는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질만큼 많은 절이 있었고 사뇌사도 그 중에 하나인데 위치로 보아서는 사뇌사에 봉안되었던 불상들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략으로 운천동 일대의 사찰들이 모두 소실된 후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복원되지 못하고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흥덕사지 구양사지 사뇌사지 등이 글씨가 새겨진 유물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 말기의 지도에도 무심천변의 노천에 방치된 불상들이 그려져 있다. 1872년(고종 9)에 그려진 『군현지도』의 「청주목지도」에 보면 청주읍성의 북쪽 북주내면(北州內面)에 5구의 불상이 그려져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청주 고지도에도 북수(北藪) 바로 남쪽에 불상 3구를 그리고 석불이라 표기하였다. 위치상으로나 불상의 형태로 보아 지금의 용화사 석불들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들 지도에서 보듯이 불상들은 오랫동안 야외에 방치되어 있었다. 아마 고려 말기 이후 조선시대 내내 노천불로 있었을 것이다. 이 불상들을 다시 한 데 모아 절을 세우게 된 것은 고종황제의 후궁인 엄비에 의해서이다.

고종황제와 엄비



엄비는 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최고 지위인 상궁이 되었기 때문에 흔히 ‘엄상궁’으로 불렸다. 명성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으니 황후의 질투로 1885년 궁 밖으로 쫓겨났다. 1895년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하자 바로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재 입궁하였다. 고종은 자신도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싸였고, 자신을 돌봐줄 여성으로 엄상궁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엄상궁은 1896년에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시킨 아관파천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후 고종은 엄상궁에게 더욱 의존하였고 영친왕 이은을 낳자 귀인(貴人)에 책봉된 후 순빈(淳嬪), 순비(淳妃)을 거쳐 1903년에는 황귀비(皇貴妃)에 책봉되었다. 궁호를 경선(慶善)이라 하여 ‘경선궁 마마’로도 불렸다. 엄황귀비는 구한말의 시대적인 요구를 잘 파악하여 여성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들여 1906년에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창설하고, 1907년에는 경영난에 부딪혀 있던 양정의숙을 도와주었다. 이외에도 궁녀들도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도록 했고, 수시로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해 주었다. 또 종로의 걸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고, 불탄 종로상점 재건축 비용이 모자라자 건축비를 대 주었으며, 진명부인회에 돈과 건물을 하사하였다. 또 대한부인회의 모범 잠업장 건립에 기금을 하사하는 등 사회 활동과 자선사업을 많이 하였던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
엄비가 어느 날 꿈을 꾸는데 부처님이 나타나 내가 지금 청주고을 무심천변 늪지에 묻혀 있으니 나를 위해서 사찰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놀라서 잠을 깬 엄비가 고종 황제에게 말하니 고종은 청주에 그러한 불상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명하였다. 당시의 청주군수 이희복(李熙復)은 어명을 받고 현지를 조사해 보니 과연 운천리 일대에 거대한 불상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다. 어떤 불상은 옆으로 누워 있었고 낚시꾼들이 그 부처님 어깨에 걸터앉아 고기를 낚는 낚시터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엄비가 궁중의 살림에 쓰기 위해 모아둔 내탕금(內帑金)을 내리어 절을 짓게 하였고, 이희복 군수는 당장에 목재를 구할 수 없었던지 상당산성 안에 있는 보국사(輔國寺)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용화사라 하였다. 용화사에 봉안된 7불은 이렇게 엄비의 현몽으로 이곳에 옮겨지고 용화사가 창건된 것이다. 얼핏 전설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모든 게 정확한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용화사



창건당시 용화사의 규모는 미륵전 15칸, 산신각 3칸, 설교전 15칸, 요사 4칸 등으로 비교적 큰 규모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1907년부터 한동안 청주재판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1935년에 법당이 화재로 전소되어 신축하였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 다시 법당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6.25전쟁 이후 노천에 방치돼 있던 7구의 석조불상들은 1972년 콘크리트 슬라브 지붕의 단층 구조로 새 법당을 지었는데, 전통 사찰로서는 어울리지 않아 이를 헐고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목조건물로 중창하여 지금의 용화보전이 되었다. 용화보전은 내부가 통해 있는 2층 형태로 설계돼 높이가 최고 5.5m에 이르는 장육불 등 대형 불상들을 봉안할 수 있게 하였다. 석조불상군 뒤로는 1000구의 작은 불상을 봉안할 수 있도록 천불감을 설치하였다. 용화사는 이밖에도 1987년에 무심천 제방에 연하여 범종루를 조성하였으며, 용화보전 앞에는 1996년에 세운 팔각오층석탑이 있고, 용화보전의 동쪽 귀퉁이에는 고려시대 석탑부재가 남아있다. <2부에 계속>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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