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몽동발이
'글. 최명임'

빛깔이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다. 붉은 듯 푸르고 푸른 듯 초록이다. 칠흑으로 이어지다 어느 구간에선 정갈한 순백이다. 몸태는 톱으로 자른 듯 뭉툭하지만, 살결은 잘 구워낸 도자기 빛깔이다. 몸에 밴 삶의 빛깔일까. 박물관 입구에서 존재감을 발하는 그의 본색이 궁금하다.
저 삶은 어떻게 빛났을까. 곡절과 시련의 흔적은 물론 껍질마저 벗어버린 몽동발이다. 톱날을 들이댈 데도 없거니와 어떤 날붙이의 서슬도 무색할 석화목이다. 시공을 넘어온 그와 접촉하는 순간 접신한 무녀처럼 몸이 떨렸다. 그가 겪어낸 숱한 번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꿈꾸는 생명 하나가 떨어졌다. 기척에 놀란 생명들이 에워싸고 들여다보았다. 처음 맡아보는 흙냄새와 야릇한 기척에 잠자코 숨을 죽였다. 생명이 꿈틀거렸다. 틈새에서 빛을 마시고 빗물을 들이켜며 땅속을 헤집었다. 엽록의 시간을 위해 줄기차게 뿌리를 뻗었다.
그의 계절은 온통 목청(木靑)으로 물들었다. 목청은 하늘의 비색과 땅의 누런 기운을 취해 생겨난 빛깔, 수수만년 생명을 이어가고 어우러지게 한 자연의 색깔이다. 푸르락푸르락 하는 목청도 신열을 앓았다. 태풍을 만나거나 벌레들이 꼬여들 때, 한 귀퉁이 먹힌다고 초록이 동나지는 않았다. 어기차게 수세를 넓히고 청록으로 깊었다. 스쳐 가는 바람에도 푸른빛이 묻었다. 빗물도 어느새 푸르고 마는 구간, 취한 것들은 모두 그가 되었다.
초록은 어찌해도 초록이다. 청록은 초록이 푸른빛을 취한 것일 뿐, 마냥 푸르른 그의 시간을 펼쳐보면 초록이 가득하다. 그가 청록을 등에 업고 날개를 뻗었다. 뛰고, 솟고 내달렸다. 허공을 가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번성의 소리가 빗발쳤다. 늘 푸르기만 하랴. 갈바람은 초록의 객기를 가라앉히고 빨강을 조합하여 싯누런 계절을 추구했다.





어른은 수세를 지양하고 생목의 누를 벗고 정제되는 구간,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빛깔이다. 그에게서 벌건 욕망이 일었다. 검은 비밀을 감추고 어리석음을 누런 띠처럼 둘렀다.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며 불린 몸, 알맹이도 없는 허대발이 그늘에서 키 작은 것들의 아우성이 쏟아졌다. 본색을 놓쳐버린 탓에 그의 가을은 회색분자처럼 칙칙한 빛깔을 드리우고 누르락붉으락했다. 빨강도 자주도 아닌, 노랑은 더더구나 아닌 꼭두서니가 그의 본색일까. 내가 빛이라는 흐뭇한 착각에 빠졌다. 대중 속에서 우뚝하고 싶은 그는 타인과 싸움에서 쟁취한 계급장이 전부였건만.
낙화는 아름다우나 추락은 아름다움을 반한 결말이다. 빛나는 날개와 얼룩덜룩한 색깔을 끌어안은 채 생목은 깊은 지하로 곤두박질쳤다. 비상하지 못하는 날개는 부러지고 팔랑대던 수식들이 떨어져나갔다. 자랑스럽다던 객체들이 썩어나갔다. 수피마저 하염없이 벗겨지고 나자 밖으로만 뻗치던 기운이 비로소 안으로 응결했다. 본색은 그즈음부터 잠잠히 우러나왔을 터. 울어보지 못한 가시나무새가 색깔의 깊이를 헤아릴라. 새도 그런 저가 가여워서, 부끄러워 가며 우는 것을.
그의 색깔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릿하다. 눈가가 벌게지다가 어느 구간에선 하르르 웃고 마는 곡절이 내게도 있었기에. 몽동발이는 아주 예전에 알았던 나의 벗이었는지도 모를 일. 삶의 궤적들 다 지우려고 빛을 찾아 지상으로 나왔나 보다. 백색광으로 되돌아가는 길목에서 나와 반가이 만난 것이다.





나무의 물성은 사라졌지만, 결은 고스란히 갖추었다. 암석으로 굳은 수심을 누가 건드려 흔들게 하랴. 살아온 흔적만은 그도 어찌하지 못했다. 저 살비듬 같은 초록과 청록과 자홍 색깔은 그리움이거나 빛나던 날의 미련이겠다. 삶이 원점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라면 몽동발이는 아직 지나야 할 구간이 남은 거다. 울긋불긋한 흔적들마저 지우면 본색이 완연하리라.
빛이 땅으로 쏟아지는 까닭은 만물의 삶에 스며들어 색깔을 입히기 위해서다. 빛은 빨강과 초록으로도 노랑을 만든다. 빨강과 파랑으로 자홍 빛깔을 짓고, 초록과 파랑을 섞어서 짠 청록의를 입혀놓고 열매 맺기를 기다린다. 숨탄것들은 모두 색깔 옷을 입고 색깔 있는 음식을 먹고 색깔 속에서 저의 존재를 밝힌다.
나는 누르락붉으락한 빛깔 옷을 입고 불안한 구간에 머물러 있다. 지름길도 탈것도 없는 구간에서 벌컥벌컥 빗물을 마시며 걷는다. 무지개를 꿈꾸었다. 무지개는 땅 위의 색깔을 모아 빛을 향해 되쏘아 올린 삶의 궤적들, 우린 일곱 빛깔로 살다가 흔적도 없이 하얗게 승화할 터. 몽동발이 저도, 나도 순백을 희구하고 있었던 거다.
존재는 모두 색깔 속에 있다. 의미 없는 색깔도 없을 테다. 발아의 계절에도, 통통 튀는 초록과 청록의 계절에도 그가 있고 자홍은 물론 칠흑 같은 계절에도 그는 분명 있었다. 원색의 시간들은 그를 밝히기 위한 장치였으므로. 잃어버린 본색을 찾아 존재감이 빛을 발하면 구간마다 떠올리며 가슴 뻐근해 할 거다.
내 몸에 걸친 잡다한 치장을 들추어 본다. 치렁치렁 매달린 객체들, 하나라도 놓치면 나도 무너질 것 같다. 그때도 삶의 방편이라며 움켜쥐고 있었다. 떼이며 울고 스스로 떼어내느라 쓰라렸던 나의 장신구들, 그것이 나인 줄 알았다. 끝내 돌려받지 못한 채 또 다른 치장으로 나를 갖추었다.
겨울 나목은 음동 추위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버려야만 다시 살 수 있기에 떠들썩했던 밖의 소리를 접고 조용히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나목하나가 몽동발이로 나기까지는 수백 년은 족히 걸리는 듯. 신물 같은 형해가 보면 볼수록 색다르다. 그의 본색은 짐작하겠지만, 내가 모르는 보다 깊은 무엇은 골수 안에 있을 터. 사람이 어찌 알랴, 그건 불가지론인 것을.
나도 생에서 은퇴할 무렵이면 치장한 이 소중한 것들이 소용없을 테니 고인 물에 뜬 너겁과 같다. 모두 여의더라도 형해는 남아야 할 터이다. 몸에 배어버린 색깔들은 두어도 괜찮을까. 누군가 나의 색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존재론에 공감해준다면 그 시간도 좋을 테니. 아, 이 또한 집착이다. 내가 다 벗어던지고 하얀 빛깔로 송두리째 타버리고서야 나에게로 환원하였음을 알게 되리라.
몽동발이 앞에서 팔랑팔랑 뛰는 초록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오그작 오그작 하루를 물고 있다. 가만히 끌어안으면 저도 나도 심장이 콩콩 뛴다. 몽동발이가 녀석들을 불러 세워 왕왕 색깔론을 들려준들, 존재론을 설파한들 알아듣기는 하려나. 지금은 제 색깔의 구간에서 마냥 초록초록하다.

EDITOR 편집팀
최명임 작가
이메일 : cmi3057@naver.com
2014년 문학저널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 회원, 내육문학회원 / 충청타임즈 ‘생의 한가운데’ 필진(전)
청주교차로 신문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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