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 여행]
무심천의 벚꽃
'숨겨진 운천동 이야기- 구루물 산책'

‘구루물 산책’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여행]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행본입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천동의 숨겨진 다채로운 발굴 이야기를 흥덕사지를 발굴한 지역 전문가를 통해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엮은 책입니다.
Cheapter8. 무심천의 벚꽃
봄의 전령사인 벚꽃은 언제부터인지 무심천의 명물이 되었다. 매년 4월 초에 벚꽃이 만개할 때면 무심천에서 청주예술제와 함께 벚꽃축제와 열려 수많은 상춘객이 몰려든다. 가족이나 연인끼리 무심천 제방에 활짝 핀 벚꽃 아래를 거닐며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미쳐 축제 행렬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은 제방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라도 즐긴다. 벚꽃은 일시에 피는 모습도 화려하지만 떨어지는 모습도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아 아름답다.
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한 낙엽활엽교목으로 높이 15m, 직경 70㎝에 달하는 나무로서 껍질이 옆으로 벗겨지며 암자갈색이고 잔가지에 털이 없다. 잎은 어긋나며 난형 또는 난상 피침형이고 길이 6∼12㎝로서 양면에 털이 없으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 또는 복거치가 있다. 꽃은 연한 홍색 또는 거의 백색인데 4, 5월에 핀다. 열매는 둥글고 6, 7월에 적색에서 흑색으로 익는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분포하고 있으며, 수직적으로는 해발 100∼1,500m 사이의 산지와 마을부근에서 잘 자란다. 벚나무는 수피가 곱고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관상수로 많이 식재되고 있어 벚꽃 필 무렵이면 남쪽부터 개화시기를 일기예보처럼 보도하기도 한다.
목재는 재질이 좋고 광택이 아름다우며, 가공성이 좋기 때문에 고급가구재나 악기재 또는 정밀기계의 목재부분으로 사용된다. 또, 수피는 완화·진해·해독의 효능이 있어 해소·피부염·심마진(蕁麻疹; 두드러기)·소양증(搔痒症; 가려움증) 등에 치료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벚나무의 꽃인 벚꽃은 봄에 화창하게 피는 분홍색, 또는 하얀색 꽃잎이 일반적이다. 대표적인 꽃말은 중간고사와 아름다운 정신(영혼), 정신적 사랑, 삶의 아름다움이다. 그 외에도 절세미인, 삶의 덧없음과 아름다움, 순결, 뛰어난 아름다움, 정신미, 교양, 부(富), 그리고 번영을 뜻하기도 한다.
왕벚나무는 한때 일본의 나라꽃이라 하여 베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에는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없으며 순수한 우리나라의 특산종이다.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왕벚나무가 도입되어 가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벚나무는 그 수가 매우 적은 희귀종이므로 생물학적 가치가 높고, 식물지리학적 연구가치가 크다고 한다.
무심천변에 벚나무가 심겨진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그 이전에는 수양버들이 제방을 따라 열을 지어 식재되어 있었다.

청주읍성도, 남석교 좌우에 식재된 수양버들



구례 운조루에 소장된 「청주읍성도」를 보더라도 무심천 제방에 수양버들이 일정 간격으로 서있는 모습과 물속에 비친 그림자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봉림수의 그림에도 수양버들이 그려져 있어 당시의 수종을 짐작하게 한다. 옛날에는 하천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가 수양버들 갯버들 같은 버드나무였다. 무심천의 여러 지류에서도 복개되기 전에는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양버들은 거의 볼 수 없고 벚나무가 무심천 양쪽 제방을 모두 차지하고 있으나 이런저런 사유로 수양버들과 벚나무가 교체되기도 하였다.
무심천 벚나무는 일제강점 초기에 청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심기 시작한 후 제방을 새로 축조한 1930년대 이후에 전 구간에 걸쳐 식재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 벚나무를 심게 된 사연이 『청주연혁지』에 기록되어 있다.
“1914년 3월에 청주에서 생겨난 청년회가 기념으로 벚나무를 식재하였다. 회원들은 집집마다 권장하여 많게는 10주, 적게는 2~3주씩 남으로는 무심천 제방 일대에 벚꽃을 식재하고 서로는 성서정(城西停)의 제방, 동으로는 성동정(城東停)의 성벽 흔적을 따라 식재하였다. 회원들은 상호 감시하여 한국인 어린이들이 나뭇가지를 꺾지 못하도록 경계하여 그 공로가 헛되지 않아 벚나무는 잘 자라서 몇 년이 되지 않아 개화하게 되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무심천의 남쪽과 서쪽 제방뿐 아니라 성동정의 성벽 흔적 즉 파훼된 읍성의 동벽 자리에도 벚나무를 심었고 아이들이 꺾어버리지 않도록 관리하였다. 동쪽 성벽 자리는 지금 청주의 중심가인 상당로를 말한다. 수양버들 가지가 휘날리던 청주의 풍경이 세월을 따라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무심천의 벚나무는 잘 자라서 10년 만에 명물이 되었다. 벚꽃 개화시기가 되면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가 사람들을 이끌어 멀리서 차를 타고 꽃구경을 오는 사람도 있었고, 무리를 지어 꽃길을 거닐면서 새봄을 만끽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일본 사람이 심은 벚나무가 일본산이고 벚꽃이 일본의 국화이므로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신문에서는 일제의 잔재인 벚나무를 베어버리자는 사설까지 실었다. 또한 벚나무가 노령이 되어 볼품이 없어졌으므로 제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실제로 무심천 벚나무는 1970년대에 들어 노쇠한 모습을 보였다. 1971년 채동환 시장이 재임하던 시절에 무심천에 벚나무를 식재하였지만, 오래된 나무의 밑동은 가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였고 굵은 가지가 부러져 꽃이 피지 않을 때는 흉물처럼 변해갔다. 개화 때는 그런대로 화사한 꽃잎으로 덮였지만 점차 옛 모습을 잃어갔고 자연히 상춘객도 줄어들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심은 벚나무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쇠락하는 과정을 거쳤다.

무심천 벚나무



1980년 서울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2천여 그루의 벚나무를 일제히 제거하였는데 이보다 조금 앞서 무심천의 벚나무도 제거되었다. 1978년부터 1980년대 초에 2차선이던 무심천 제방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아름드리였던 무심천 벚나무도 잘려나갔다. 일제 청산이라는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벚나무 제거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다만, 확장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운천동구간의 제방에는 버드나무가 유지되어 늘어진 가지가 시원한 그늘은 만들어주고 있었고, 다른 곳에도 거대한 버드나무들이 일부 보존되어 있었다. 이후 1984년경에 버드나무 꽃에 의한 알레르기 발생 등의 유해성 논란이 일면서 지헌정 시장의 재임시절에 굵기가 8~10㎝의 벚나무를 다시 심었는데 역시나 일본 나무라는 논란이 불거졌고, 나기정 시장이 재임하던 1990년대 초에 벚나무의 원산지가 우리나라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종식되었다. 이 무렵 전국의 가로수로 가장 많이 식재된 것이 벚나무여서 지금은 벚꽃 명소가 전국에 수없이 생겨났다. 현재 무심천에 줄지어 있는 벚나무는 이때 심은 묘목이 성장한 것이다. 30여 년이 지나면서 지금은 노수가 되어가지만 4월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꽃구경 나온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져 운천동 지역에도 흥덕대교 북쪽에 최근에 조성한 꽃정원과 함께 시민들의 좋은 나들이 장소가 되고 있다.(참고문헌; 청주시지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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