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 여행]
빨래판의 기적, 운천동 신라사적비
'숨겨진 운천동 이야기- 구루물 산책'

‘구루물 산책’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여행]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행본입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천동의 숨겨진 다채로운 발굴 이야기를 흥덕사지를 발굴한 지역 전문가를 통해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엮은 책입니다.
Cheapter7. 빨래판의 기적, 운천동 신라사적비
운천동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절이 있었다. 흥덕사지 구양사지 사뇌사지를 비롯하여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절터도 여러 곳 있었다. 그 중에 한 곳으로 산직말 절터도 있었는데 이 절터에 대해서는 정확한 위치나 범위가 밝혀지지 않은 채 택지개발이 이루어졌다.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 운천동 신라사적비이다. 1982년에 주민의 제보로 옛 산직말 어귀 당시의 주소로 운천동 449번지에 있었던 마을 공동우물에서 빨래판으로 사용하던 신라 사적비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적비로 밝혀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을 다듬어 글자를 새긴 비석으로 현존 크기는 높이 92㎝, 너비 91㎝, 두께 15~20㎝이며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운천동 신라사적비



이 비석은 통일신라시대에 청주가 정치 행정 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인 동시에 운천동 지역이 그 핵심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아마도 수백 년 동안 빨래판으로 사용된 듯 겉면이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어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물을 뿌리며 판독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에 이곳에 있었던 어느 사찰에 관련된 사적비로 확인되었다. 많은 글자가 판독이 불가하도록 마모가 심하여 전체의 내용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불법을 찬양하고 국왕의 덕을 칭송하며 삼한 즉 삼국을 통일한 위업을 기리는 호국불교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왼쪽 둘째 줄에 새겨진 수공(壽拱) 2년은 당나라 측천무후의 연호인 수공(垂拱)과 같은 것으로 보아 686년(신문왕 6)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었다. 685년에 청주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었으니 바로 다음 해에 운천동에 절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운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지배세력이 청주지역, 특히 운천동 일대를 얼마나 중요시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다.
이 사적비는 상단부가 결실된 상태이다. 비문의 글자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부분이 사라져서 중간부터 기록되어 있다. 아래쪽은 비석받침에 꽂을 수 있도록 한 흔적이 보인다. 원래 비석의 크기는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의 두 배 정도인 약 2m 남짓으로 추정된다. 비석에는 글씨를 쓰기 전에 외곽에 선을 두른 흔적이 보이나 분명하지 않고 글자와 글자 사이에 방형으로 구획한 정간(井間)은 없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가로 15행, 세로 17자 정도가 남아있는데, 모두 255자 정도로 추정되나 현재 200여 자만 판독할 수 있다. 비석 전체적으로는 1,100여 자가 새겨졌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하지는 않다.
비문은 빨래판 등으로 오래 사용한 까닭에 마모가 심하여 제대로 남은 글자를 찾기도 어렵고 남아있는 글자도 모호하여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빨래판으로 사용했던 면은 거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어 몇 자만을 읽을 수 있고, 그 반대쪽 면은 제법 많은 글자를 읽을 수 있다. 측면의 글자는 3분의 1 정도만 읽을 수 있다. 판독이 가능한 글자를 토대로 비문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비석 윗부분이 결실되었기 때문에 문장이 이어지지 않고, 군데군데 글씨가 닳아 없어져서 읽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문맥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도 판독이 가능한 문장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내용을 파악하거나 추리할 수 있다.
비문의 구절에는 불교에 관한 기사가 많이 있다. ‘사문보혜(沙門普惠)’나 ‘해심법사(海心法師)’와 같은 승려의 이름, ‘시방단월(十方檀越)’이나 ‘도량(道場)’, ‘선근구족(善根具足)’과 같은 불전의 구절 등이다. 그리고 사찰의 건축에 관한 내용도 있다. 그러므로 비문의 내용은 어떤 절의 사적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하락영도(河洛靈圖)’와 같은 유교 문구와 ‘단혈(丹穴)’, ‘위우(委羽)’ 등과 같은 도교 용어도 사용해서 유불도의 용어를 모두 구사하는 지식이 풍부한 이가 지은 비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승려가 주축이 되어 신도들과 함께 사찰을 창건한 내용을 다채로운 사륙변려체의 문장으로 지은 것이다.
비문 중에는 ‘국주대왕(國主大王)’, ‘주성대왕(主聖大王)’ 등과 신라 관등인 ‘아간(阿干)’ 등이 보이고, ‘수공이년 세차병술(壽拱二年 歲次丙戌)’이라는 기록이 있다. ‘수공이년’은 당나라 측천무후의 연호 수공(垂拱) 2년인 686년에 해당하는데 신라 신문왕 6년이다. 신라 관등과 신라 신문왕 6년에 해당하는 당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비문의 제작 시기가 686년 이후인 사실을 알려준다.
비문에 보이는 ‘국주대왕’과 ‘주성대왕’은 신문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비문의 작성 시기는 686년 이후 신문왕 대일 것이다. 비문 중에 연호와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합삼한이광지(合三韓而廣地)’, 즉 삼한을 합하여 땅을 넓혔다는 구절이다. 여기서 삼한은 곧 삼국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군대까지 축출한 상황에서 삼국을 통일한 위업을 찬양한 내용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의식, 즉 삼한 일통의식을 가졌다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인용되는 구절이다.
신문왕 5년(685) 3월에 청주에 5소경 가운데 하나인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김원태를 사신으로 삼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청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비문에 보이는 아간이 서원경 사신인 김원태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혹시 나중에 비석의 윗부분을 찾을 수 있다면 더 많은 내용을 알 수 있겠지만, 현재 남아있는 비의 내용만으로도 신문왕대 청주 지역이 갖는 역사적 위상은 충분히 입증이 된다.

산직말의 현재모습



청주는 삼국통일 직후 서원소경이 설치될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삼국통일의 위업을 찬양하는 내용이 포함된 사찰의 중수비가 건립될 정도로 중앙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곳이었다. 고대국가에서 중앙과 지방의 밀접한 관계는 문화교류와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 청주가 통일신라시대에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생생한 증거가 바로 운천동 신라사적비이다. 또한 청주의 역사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실증자료임에 틀림이 없다.(참고문헌; 청주시지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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