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싸리비
'글. 이정연'

봄에는 싸리비 꽃잎을 쓸고
여름엔 싸리비 빗물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겨울엔 싸리비 흰눈을 쓸고

단순한 노랫말 속에 고향집 마당의 사계가 추억 속의 영화처럼 펼쳐지고 나는 어느새 자신감으로 충만해 진다. 어릴 적 싸리비 하나를 만들어 마당을 쓸었던 일로 인해 아버지가 나를 완전히 인정해 주신 일 때문이다. 고향집에는 온갖 빗자루가 많았다. 섬세해서 방 쓸기에 좋은 갈비, 타작마당의 낟알을 한 톨도 흘려보내지 않던 알뜰한 수수비, 가을마당의 마른 감잎과 함께 쓸쓸함을 쓸던 시누대비나 싸리비는 늘 나를 고향으로 오라 돌아오라 손짓한다.
한가위를 앞둔 어느 날 시누대비로 마당을 쓸던 나는 비질에 자꾸 파이는 마당도 거슬렸지만 백 평 남짓한 마당을 다 쓸기엔 비가 너무 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작마당에 상처를 내면 아버지는 곡식낟알이 박힌다고 불같이 역정을 내셨다. 패는 마당도 그렇지만 그 시누대비로 마당을 쓸다가는 내일아침까지 쓸어도 마당을 다 못 쓸 것 같았다. 친구들은 저 아래 배꼽마당에서 어서 오라 손짓하는데…….





시누대비를 보니 새로 만들어도 역시 마당에 상처를 낼 것 같아 뒷산으로 올라가 얼마든지 있는 싸리나무를 베어왔다. 시누대비를 찬찬히 뜯어보니 만들기에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우선 쭉 뻗어 고운 싸리나무들을 골라 약간씩 키가 어긋나게 놓은 후 또 한 묶음을 그렇게 만들어 반대방향으로 놓고 칡넝쿨로 느슨하게 묶어 비틀어 가지런히 하면 싸리대가 빠지지도 않고 서로 힘을 받아 잘 쓸린다. 그렇게 몇 곳을 보기 좋게 묶은 뒤 튀어나온 부분을 낫으로 대강 정리하고 보니 그럴 듯한 싸리비가 되었다. 금방 만든 싸리비로 마당을 쓸어보니 닳아빠진 시누대비로 쓸 때보다 곱게 쓸리고 몇 배는 더 능률이 오르는 것 같았다. 놀다 돌아와 보니 다른 때 같으면 한 소리 하실 아버지가 싸리비를 보고 '그 녀석 참' 하며 저녁 내내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않으셨다.
싸리비로 자신감을 얻은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갈비도 만들었다. 아직 덜 핀 갈대의 꽃대를 뽑아와 소금물에 삶고 그늘에 말려 방비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만들다 차츰 발전해서 나중엔 손잡이 부분에 헝겊을 대고 감촉을 좋게 하고 못에 걸 수 있도록 철사로 고리까지 만들어 가지런히 걸어 두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예쁘다며 너나없이 달라고 해서 주고 장날에는 내다 팔기 까지 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길옆 냇가에서 갈꽃대를 뽑아오고 어머니는 낮엔 농사일을 하시고 밤엔 빗자루를 만드는 우리는 환상의 복식조였다.
갈비의 인기가 하도 좋아 자꾸 만들고 싶었는데 갈꽃이 다 피어버려서 이번에는 수수비를 만들었다. 수수 낟알을 다 털어낸 빈 수숫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늘에 말리고 노글노글 만지기 좋을 때 모양을 살려 수수비를 만들었다. 부엌이나 쇠죽솥 아궁이 앞 토방을 쓸기에 더없이 좋은 수수비를 여러 자루 만들어 헛간에 걸어두었다. 드나들며 가지런히 걸린 수수비를 보며 그 아무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요긴하게 쓰시는 어머니의 알뜰함과 지혜가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아 존경심이 일었다.
갈비 수수비 싸리비가 언제라도 출정할 병정들처럼 가지런히 걸린 헛간이 그립다. 봄이면 싸리비로 깨끗이 쓸어 놓은 물결무늬 고운 황토 마당에 하염없이 떨어지던 모과 꽃잎, 혹시라도 고운 흙이 쓸려갈까 조심조심 빗물을 쓸어내던 장마철의 마당, 늦가을 그립던 이의 발자국 소리 같아 소스라쳐 돌아보면 시나브로 떨어지는 알록달록 고운 감잎, 마당 자욱이 깔린 낙엽을 쓸어 모아 쇠죽솥 아궁이 넣고 불을 지피면 쓸쓸히 타들어 가는 가녀린 생명의 흔적들 그 위로 쏟아지는 부질없는 내 상념까지 태우고 나면 가을도 훌쩍 깊어 겨울의 문턱에 닿겠지.





흰 눈이 온 천지를 덮는 아침 주섬주섬 수수비를 챙겨 아궁이 앞을 쓸고 그 수수비를 깔고 앉아 쇠죽솥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시리게 파란 하늘로 뻗은 감나무엔 몇 개 남은 감을 먹느라 까치소리 자지러지고 그 소리에 놀라 감나무에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지면 그리운 손님이라도 오실까 설레게 마련인 아침 그런 날에는 종일 사립문으로 눈이 간다.
부지런히 늙어서 정년퇴직을 하고 마당 넓은 고향집에서 그 빗자루들처럼 살고 싶다. 싸리비는 넓은 마당을 다 쓸면서도 불평이 없이 수수비가 있는 부엌을 넘보지 않는다. 수수비는 갈비가 있는 따뜻한 방을 시샘하지 않고 오직 있는 그 자리에서 제 본분을 다할 뿐이다. 꽃이 지면 수줍은 소녀처럼 꽃잎을 쓸고 비가 오면 온몸이 다 젖어서 빗물을 쓸고 낙엽지면 쓸쓸히 낙엽을 쓸고 눈이 오면 꽁꽁 얼어 흰 눈을 쓴다. 이름도 정겹던 옛날의 그 빗자루들처럼 날마다 내 마음 밭을 깨끗이 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말아야지. 어느 날 문득 싸리비는 닳고 닳아 몽당비가 되고 그 몽당비마저 아궁이에서 한 줌 불쏘시개로 남은 삶을 불태운다. 아궁이 속 한 점 저항 없이 순순히 타오르던 그 고운 불길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 가는 싸리비의 일생이다. 몽당비처럼 나도 그렇게 한 점 아름다운 불꽃으로 마지막 삶을 태우고 싶다.

EDITOR 편집팀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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