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가이드

2023~2024 한국관광 100선
나혜석·이응노의 예술혼 느끼고 1080개 계단 오르며 세상 번뇌 씻고
'충남 예산군 수덕사'

수덕사를 제대로 보려면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편한 신발, 그리고 사전 지식과 함께라면 더 좋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는 덕숭산이 있다.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 중 하나다. ‘호서의 금강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높이 496m로 아담한 산이다. 덕숭산 자락에 수덕사가 안겨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 그럴까, 수덕사는 규모가 큰 대찰이지만 가람 전체에서 따뜻한 느낌이 전해온다.

수덕사 입구에는 나혜석과 이응노의 기억이 담겨있는 수덕여관이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봄바람을 맞으며 수덕사로 향했다. 사찰 음식점이 즐비한 식당가를 지나 주차장을 거쳐 몇 분만 걸어 올라가면 선문(禪門)이 나온다. 수덕사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대개의 사찰들이 일주문으로 속세와의 경계를 짓는 것과 달리 수덕사에는 선문이 있다. 선문엔 한글로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 총림은 승려들의 참선수행을 위한 선원, 경전 교육을 위한 강원, 계율 교육을 위한 율원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뜻한다. 조계종에는 6개의 총림이 있다. 수덕사,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동화사, 범어사다.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인 1308년 지어졌다. 연대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한글 현판에서 알 수 있듯 수덕사엔 다른 사찰과 차별화되는 전통과 분위기가 있다. 약 1500여 년간 법통을 지켜오면서 대중을 포용하고 시대 변화에 감응해온 실용주의적 태도다. 덕숭산 자락에 1947년에 세워진 만공탑도 해방 직후 세워진 탑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근대적인 형태에 한글로 탑명이 적혀 있다. 수덕사는 백제 시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위덕왕(554~597) 때 창건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선문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일주문을 만난다. 그 왼쪽에 아담한 초가지붕집이 보인다. ㄷ자 형태로 지어진 이 집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바로 수덕여관이다.

일엽 스님이 머물렀던 환희대 가는길. (사진. 한국관광공사)



수덕여관엔 한국 근현대 미술의 대표 화가 나혜석, 장욱진, 이응노의 자취가 서려 있다. 이야기는 나혜석(1896~1948)에서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신여성 화가로 이름을 떨친 나혜석은 1937년경 수덕사로 온다. 1933년 만공선사의 가르침 아래 출가해 수덕사 견성암에서 비구니 선사로 정진하고 있던 일엽 스님(1896~1971)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너럭바위에 생생한 이응노의 암각화
나혜석은 출가의 뜻을 밝혔지만 일엽 스님과 만공 스님은 그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과거에서 끝까지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혜석의 성정을 보고 내린 판단이었다. 만공 스님은 일제강점기 조선 불교를 중흥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대선사(大禪師)다. 출가 전 신여성 운동을 하며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하고 애인과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낳았던 일엽 스님은 출가 후 아들과의 인연을 단호하게 끊어낸 반면 나혜석은 훗날 요양원에 머물면서도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탈출을 감행한 것을 보면 그들의 판단이 맞았던 듯하다.
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나혜석은 1944년경까지 일주문 옆 수덕여관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한다. 그곳에서 나혜석은 여러 예술가들과 조우한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그림 공부를 하던 장욱진(1917~1990)은 성홍열에 걸려 요양을 위해 수덕사에 6개월간 머물게 된다. 그때 나혜석을 만난다. 나혜석은 장욱진과 같이 스케치를 하며 “나보다 더 잘 그린다”고 장욱진을 칭찬했다고 한다. 자신감을 얻은 장욱진은 이후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충남 홍성군이 고향인 고암 이응노(1904~1989) 역시 수덕여관에서 나혜석을 만났다. 당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청년화가였던 고암은 자주 나혜석을 찾아왔다. 나혜석과의 만남은 고암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을 떠난 직후인 1944년 고암은 수덕여관을 사들여 부인 박귀희 씨에게 맡긴다. 1958년 고암은 나혜석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 마음에 품어왔던 도시,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제자이자 연인인 박인경 씨와 함께였다. 박귀희 씨는 남편이 파리로 떠난 후 수덕여관을 여관으로 고쳐 운영하며 남편을 기다린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1967년이다.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한국으로 송환돼 옥에 갇힌 고암을 박 씨는 뒷바라지한다. 2년 후 출소한 고암은 1969년 두 달여간 수덕여관에 머문다. 그 기간에 수덕여관 뒤뜰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 두 점을 남긴다. 암각화는 지금도 그 자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수덕여관과 암각화 바위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박 씨는 2001년 별세했다.

수덕사는 충남 예산군에 있는 덕숭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수덕사 중창 설화 품은 관음바위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수덕여관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보자. 일주문과 금강문, 황하정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보인다. 수덕사 대웅전은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중 건립 연도가 명확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을 해체 수리하던 중 연도를 알게 됐다. 대들보에서 ‘지대원년(至大元年)’이라는 먹글씨가 발견됐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을 의미한다.
대웅전 곳곳엔 목조건축의 아름다움이 잘 보존돼 있다. 건물 자체가 국보로 지정돼 있다. 건물 옆면이 특히 아름답다.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을 배흘림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배흘림기둥이란 기둥 중간이 굵고 위와 아래로 가면서 차츰 가늘어지는 기둥 모양을 의미한다. 지붕의 서까래를 받쳐주는 나무를 ‘도리’라고 하는데 도리와 도리 사이를 곡선 형태로 된 목재가 잇고 있다. 소꼬리 모양이라는 뜻의 ‘우미량’이다. 못을 쓰지 않고 목재로 정교하게 조립해서 짓는 목조건축의 백미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서면 왼쪽에 관음바위가 보인다. 수덕사 중창과 관련한 설화가 서려 있는 바위다. 백제가 망한 뒤 절은 퇴락했다. 신라 대부호의 아들이었던 수덕 도령은 덕숭 낭자를 보고 한눈에 반해 청혼을 한다. 덕숭 낭자는 백제가 망한 뒤 퇴락한 절이 중창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수덕 도령은 집안의 재산을 동원해 절을 완공한다. 약속대로 두 사람은 혼인 날짜를 잡는다. 혼인 전 낭자를 찾아간 수덕 도령이 낭자의 손을 잡자 그 순간 덕숭 낭자는 사라진다. 언뜻 대웅전 옆 커다란 바위틈으로 덕숭 낭자가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도령은 낭자가 흘린 버선 한 짝을 주워든다. 덕숭 낭자는 절의 중창을 위해 현신한 관세음보살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커다란 바위를 관음바위라 부른다.

수덕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 이응노 화가가 새겨놓은 추상문자 암각화가 보인다. (사진. 하주희 기자)


산길 백 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대웅전까지 둘러봤으면 이제는 덕숭산을 오를 차례다. 정상까지는 약 1.89㎞, 1시간 남짓 걸린다. 등산 난이도는 낮은 편이다. 벽초 스님이 놓은 1080개의 돌계단 덕이다. 오르내리며 108번뇌를 떨쳐내면 좋겠다. 계단을 오르다보면 견성암, 소림초당, 금선대 같은 산내 암자를 만나게 된다. 옛 노래를 좋아한다면 ‘수덕사의 여승’을 떠올릴 수 있다.
‘산길 백 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이 노래 때문에 수덕사를 비구니(여성 승려)절로 아는 이들도 있지만 남자 승려가 있는 비구 사찰이다. 덕숭산 자락에 있는 견성암과 환희대는 비구니 사찰이다. 견성암은 한국 근현대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다. 1908년 만공선사가 세웠다. 이곳에서 바로 일엽 스님이 공부했다. 비구니 총림으로서 요즘도 비구니 선승들을 배출하고 있다. 비오는 날이면 줄지어 건물 안을 거니는 비구니 스님들을 볼 수 있다. 환희대는 일엽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돌계단을 올라가다보면 정혜사에 닿는다. 수덕사와 함께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이다. 만공 스님이 중수하면서 사세가 커졌다.
덕숭산에는 불교 유적들도 곳곳에 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과 만공탑(滿空塔)이 대표적이다. 1983년 충남 예산군 화전리에서 석조사면불상이 발견됐다. 조사해보니 백제시대에 조성된 석불이었다. 동서남북 사면에 각각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이 조각돼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초의 석조사면불상이다. 보물로 지정됐다. 이걸 그대로 재현해놓은 게 덕숭산에 있는 사면석불이다. 본래 석불이 발견될 때 불두(부처상의 머리)와 손 부분이 유실돼 있었는데 재현한 석불에는 불두와 손을 갖춰놨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만공탑은 만공 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47년 건립한 석탑이다. 정면에는 ‘만공탑’, 좌우측면에는 ‘세계일화(世界一花)’, ‘백초시불모(百艸是佛母)’,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 등 만공 스님의 친필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중 ‘세계일화’는 만공탑뿐 아니라 수덕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만공 스님은 무궁화 꽃잎에 먹을 묻혀 ‘세계일화’라고 썼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조선(朝鮮)이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저 미웠던 왜놈들까지도 부처로 보아야 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다시 돌계단을 내려와 일주문 부근에 있는 수덕사근역성보관을 가봐도 좋겠다. 수덕사는 물론 부근의 사찰에서 나온 문화재들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만공 스님의 거문고를 꼭 봐야 한다. 만공 스님이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에게 하사받은 거문고다. 거문고의 본래 주인은 고려시대 공민왕(1330~1374)이었다고 전해진다.
근역성보관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관이다. 이외에도 연구 조사 등 때문에 비정기적으로 휴관할 수 있으니 사전에 문의가 필요하다. 수덕사 자체는 오후 5시 30분이면 입장이 마감된다. 오후 늦게 가면 덕숭산에 오르기 힘들기 때문에 되도록 오전에 가는 편이 좋다.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종교 시설이기 때문에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고 돌아다니는 등의 행위는 자제해야 한다.
식사 때가 됐다면 수덕사 앞 식당가에 가면 된다. 산채비빔밥과 더덕구이를 추천한다. 수덕사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활발히 운영 중이다. 고즈넉한 사찰에서 휴식하며 따스한 덕숭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EDITOR 편집팀
K-공감
전화 : 044-203-3016
주소 : 세종특별자치시 갈매로 388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