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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무를 지키고, 나무는 사람들을 돌본다

2021-02-08

라이프가이드 여행


충북의 숲과 나무 - 청주Ⅱ
사람들은 나무를 지키고, 나무는 사람들을 돌본다
'충북의 오래된 나무와 마을 숲을 찾아..'

    수곡동 새터마을 느티나무와 잠두봉 솔숲 분동고개를 추억하는 할아버지 얼굴에 아이 같은 웃음이 피어났다. 과거시험 장원급제를 기념하기 위해 심은 봉명동 소나무, 고은리 고택과 함께 늙어가는 오래된 나무들, 마을을 지키는 병암리 버드나무, 그리고 관정리 은행나무까지 돌아 본 한겨울 어느 날 이야기.
580년 넘은 느티나무가 있는 새터마을
    청렴연수원 기적의 도서관 시내버스 정류장에 내려 구룡산로 346번 길로 접어들었다. 언덕배기 모란아파트를 지나 내리막길을 다 내려서면 ‘빌라촌’이다. 유니빌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멀리 보이는 골목 끝 커다란 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다가갈수록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나무의 모습에서 세월이 느껴진다. 580년 넘은 느티나무다.
    예로부터 이 마을을 새터마을이라 했다. 조선시대 말에 현재 모충초등학교 주변 고당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제주 고씨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느티나무 옆에서 우연히 제주 고씨 후손을 만나 옛 이야기를 들었다.
 
새터마을 청주유통 앞에 있는 450년 넘은 느티나무

    어릴 때 나무에 만들어 놓은 그네를 타던 이야기를 하는, 70세를 훌쩍 넘긴 그의 얼굴에 아이 같은 웃음이 피어난다. 느티나무 고목은 새터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나무 주변에 우물과 연자방아가 있었다. 집안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들의 발길도 이 나무 아래에서 분주했겠다. 그는 나무에 금줄이 묶여 있던 것도 기억했다.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평안과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마을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마을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함께 했던 이 나무가 일제강점기에 잘려나갈 뻔했다. 무슨 이유인지를 모르지만 당시 일본 사람이 이 나무를 잘라갈려고 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간신히 막아서 지금껏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나무는 마을 사람들을 돌보고 사람들은 나무를 지켰다.
    580년 넘은 느티나무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청주유통 앞 작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 위 빈터에도 450년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그 나무를 보고 다시 돌아와 580년 넘은 느티나무 뒤로 난 골목길로 걸었다. 이 길은 수곡동과 분평동을 넘나드는 고갯길이었다.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분동고개라고 했다. 고개를 넘으면 분평동 안뜸과 토끼몰이가 나왔다. 고갯마루 동쪽이 잠두봉이다. 청주남중학교를 품고 있는 잠두봉 솔숲은 마을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는 곳이다.
 
봉명동 봉황송
 
늘 푸른 기상, 봉황송
    충북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은 봉명2송정동행정복지센터 일대의 형국이 봉황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은 옛 백봉산 자락이었다. 지금은 백봉공원이 있어 옛 백봉산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백봉산 자락에 있는 봉송어린이공원은 코로나19와 한파 때문인지 노는 아이들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다. 깔깔거리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길을 돌리는데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여행자를 반긴다. 소나무 옆 유래비에 봉황송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봉황송 유래비에 따르면 백봉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의령 남씨 집성촌이 있었다. 조선 개국공신 남은이 그 가문이다. 남은의 후대 사람 응호와 응수 형제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집성촌이 됐다. 응호의 아들이 조선 광해군 때 무과에 장원급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소나무가 봉황송이다. 약 400년 정도 된 소나무다. 보호수 가운데 누가 언제 심은 나무인지 밝혀진 보기 드문 나무다.
마을을 지키는 버드나무들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과 미원면을 잇는 단재로 주변 마을에도 오래된 나무들 있어 마을에 내려오는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일면 윗고분터길에 오래된 나무가 세 그루 있다. 고은3구 마을회관 옆에 우뚝 선 느티나무는 500년 가까이 살고 있는 고목이다. 보호수로 지정됐다. 느티나무 고목의 마중을 받으며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청주 고은리 고택이 나온다. 1861년에 지은 안채와 20세기 중반에 지은 사랑채, 행랑채, 광채, 곳간채가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33호다.
 
(左) 고은3구 5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       (右)고은3구 마을회관 옆 5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

    고택 옆에 향나무와 회화나무가 있다. 보호수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오래돼 보인다. 고택 주인 말에 따르면 이 두 나무도 느티나무 고목과 수령이 비슷하다. 향나무에 옴폭 파인 자국은 예로부터 고택 주인이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기 위해 나무 조각을 파낸 흔적이다. 우뚝 선 향나무와 줄기를 맞댄 회화나무가 비스듬히 자란다. 고택의 흙돌담장이 두 나무와 어울려 운치를 자아낸다.
    병암리에는 마을을 지키는 버드나무들이 있다.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 가운데 오래된 버드나무 두 그루가 덩그러니 서있다. 옛날에는 십여 그루 정도 있었는데 다 죽고 두 그루만 남았다. 이곳에 버드나무를 병풍처럼 심은 이유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야기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을에 해마다 이유 없이 사람이 죽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마을을 지나던 어떤 사람이 마을 앞 개울가에 병풍 같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서 나쁜 기운이 나와 마을에 해를 끼치니 마을 앞에 버드나무를 심어 병풍바위의 나쁜 기운을 막으라고 했단다. 그래서 병풍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버드나무 십여 그루를 심었다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버드나무 고목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보호수로 지정됐다. 400살이 다 돼간다.
    관정리에는 570년이 다 돼가는 은행나무가 있다. 조선시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신하윤 선생이 심었다고 알려졌다.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조선시대 사람 백석정 신교의 글을 새긴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