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나에게 비밀이 생겼다
'글. 유병숙'

요즘 들어 무엇을 먹어도 입맛이 없다. 밥 먹자는 말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고 니글니글해진다. 식구들이 즐겨 먹는 청국장, 순두부, 감자탕, 추어탕 등은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부글거린다.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는데 어찌 된 일일까?
미각은 삶의 원초적인 근간과 맥이 닿아있다. 누구든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어야 살 수 있다. 이 사실 앞에서 나는 산다는 일의 엄연함을 느낀다. 앓는 남편의 입맛을 잃지 않게 하려고 구미가 당긴다는 음식을 찾아 나섰고 시어머니의 손맛을 되살리려 노력하기도 했다. 정성을 들인 탓인지 그이는 건강을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하지만 한고비를 넘기자, 이번엔 내가 탈이 났다.
주방에서 콧노래가 들려온다. 남편이 음식을 만들며 흥에 겨운지 휘파람까지 불어댄다. 자신이 먹고 싶은 걸 스스로 만드는 중이다. 마련한 음식들을 식탁에 진설해 놓고 내 표정을 살피며 어때? 하고 묻는다. 음식 장만하는 일이 힘들기는커녕 즐거워 죽겠단다.





남편은 양념장에 버무린 불고기를 선호한다. 그이 앞에서 나는 고소한 생고기 구이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참곤 한다. 생선만 해도 그렇다. 살짝 소금을 뿌려 구이를 했으면 좋겠는데, 남편 입맛에 맞추어 조림을 해야 한다. 나물은 종류에 따라 양념을 넣을 때마다 독특한 맛이 나지만 참기름을 떨어뜨리면 그 고유한 맛의 차이가 희미해진다. 식구들은 참기름에 무친 나물을 좋아하지만 나는 나물 본연의 맛에 더 구미가 당긴다.
자문해 보았다. 요리하며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던가? 의무로 부엌에서 살았고, 식구들 기호에 맞게 음식을 장만하고 조리하느라 힘써왔다. 더러 가다 재미가 쏠쏠한 적도 있었으나 살림은 고되기만 했다.
먹는 게 즐겁지 않으니 사는 일이 시들해진다. 식구들 우선으로 살아오느라 정작 나를 위안할 형편이나 시간적 여유를 가져보지 못했다. 입맛이 없으니 만사가 귀찮고 남 탓을 자꾸 하게 된다. 추웠던 옛 기억이 가슴을 치고 지나간다. 시어머니는 이상하게도 식탁에 내 밥숟가락을 놓지 않으셨다. 식구들 밥을 다 뜨고도 내 밥은 떠 놓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국을 데우거나 반찬을 채워주기 위해 나는 수시로 밥상을 떠나야 했다. 간신히 밥을 먹을라치면 어느새 밥상 위는 파장 분위기였다. 밥맛은커녕,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너나없이 그렇게 살았다.
좋아하던 음식들을 하나둘 떠올려보다 불쑥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My Favourite Things)’이라는 가사가 생각났다.

장미꽃에 맺힌 이슬과 아기 고양이의 수염, 반짝이는 구리 주전자와 따뜻한 털장갑, 노끈에 묶인 갈색의 소포 꾸러미, 크림색 조랑말과 바삭바삭한 사과파이, 초인종과 썰매 종소리, 누들이 들어간 커틀릿, 달빛을 받으며 나는 기러기들, 흰 치마에 파란 허리띠를 맨 소녀들, 콧잔등과 속눈썹에 내려앉는 눈송이들, 봄을 맞아 녹아드는 은백색 겨울….

불현듯 천진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좋아하고 즐겼던 것들을 되짚다 보면 혹시 가출한 입맛도 돌아오지 않을까? 가슴이 울렁였다. 그러나 기억은 아득하기만 했다. 과연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입맛도 묵묵부답이었다.





김장하던 날 동생이 해 준 밥을 먹었다. 된장국을 떠먹다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굴 무침에 겉절이, 돼지고기 수육 등 엄니 냄새가 물씬 배어있는 밥상에 큰 위로를 받았다. 엄니의 솜씨를 물려받은 동생의 음식에는 나를 위무하는 맛이 담겨 있었다. 모처럼 속이 개운했다. 뜻하지 않은 포만감에 불쑥,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워졌다.
동생의 밥상은 나에게 일탈을 꿈꾸게 했다. 내 입맛의 근원이 응원을 보탰다. 이제 나만의 맛을 찾아 나서자고 결심해 본다. 가끔은 나만의 식탁도 차려보리라. 좋아하던 것들을 잊고 살아왔던 나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다. 생은 저지르는 자의 몫이라 했던가! 용기 내어 시작해 볼 일이다.

찐 고구마에 젓가락을 꽂아본다. 덜 익힌 고구마의 식감!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지금 나는 식구들 몰래 나만의 맛을 즐기는 중이다!

EDITOR 편집팀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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