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그냥 살아요
'글. 유병숙'

허리통증이 전에 없이 지속되어 병원을 찾았다. 오늘은 또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의사가 특유의 경쾌한 목소리로 묻는다. 오른쪽으로 삐따딱하게 휘어진 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선 나는 더듬더듬 증세를 이야기했다. 걷기도 힘들고, 앉지도 못해요. 심지어 밥도 못 먹겠어요. 임자 만난 듯 푸념이 길어졌다. 아휴,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지요. 의사는 진료용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3번, 4번 척추가 좁아졌고, 무릎에 이상이 있고…. 진료 기록을 되뇌었다. 우선 엑스레이를 찍어 보자고 한다.





허리가 많이 휘었어요. 의사는 S자형으로 틀어진 모양이 선명하게 찍힌 엑스레이를 보여주었다. 저게 나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아파서 생긴 일시적 현상이지요? 아니에요, 앞으로 저 모양대로 점점 굳어질 거예요. 귀를 의심했다. 연식이 좀 돼서 그래요.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한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물었다. 지금부터 체조 열심히 하고 자세도 바르게 하면 될까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는 약이나 물리치료 처방과 함께 매번 맨손체조를 권하곤 했다. 무릎이 시큰거려 진료실을 찾았을 때는 스쿼트 자세가 그려진 프린트물을 내놓았다. 다리 간격을 어깨너비 정도로 유지하고…. 설명하다 답답하다는 듯 벌떡 일어나 시범을 보였다. 그의 동작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어깨가 무너지듯 아팠을 때도 체조 유형이 그려진 종이를 건네주며 꾸준히 하면 좋아진다고 했다. 하루는 발바닥이 아파 갔더니 족저근막염이라며 난데없이 책상 밑에서 스펀지를 쑥 꺼냈다. 이걸 신발에 깔아 봐요. 발바닥이 푹신하면 통증이 좀 줄어들어요. 아프지 않으면 약은 끊어도 된단다. 그가 권하는 운동 처방은 효과가 좋아서 병원을 몇 번 찾지 않아도 증상이 꼬리를 내리곤 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묘안을 제시할까? 의사는 웃으며 에이, 소용없어요, 그냥 사세요! 한다. 아니, 이렇게 휘었는데, 그냥 이대로 살아요? 무슨 방법이 없나요? 눈앞이 깜깜했다. 허허, 무리해서 더 다치지 말고, 그냥 사세요. 물리치료 꾸준히 받아 보시고요. 평소와 다른 말에 당황했다.
물리치료실로 향하는 마음이 무거웠다. 치료의 첫 단계는 찜질이었다. 허리의 긴장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으나 뒤척이자 또 예의 통증이 밀려왔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허리가 반원처럼 휘어진 엄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긴 허리가 약한 게 유전이라면 무슨 운동을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사실 허리가 삐딱해지는 증상은 오랜 습관처럼 되풀이되었다. 명절이나 집안의 대소사를 치를 때마다 나는 부엌 바닥에 쭈그려 앉아 전을 부치곤 했다. 일을 마치기도 전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시어머니는 내 허리가 길어서 그렇다며 탓을 하셨다. 그 말씀이 더 아팠다. 시집살이가 힘들 때는 핑계처럼 통증이 찾아왔다. 비단 어디 허리뿐인가? 부정맥에, 위경련에, 이석증, 메니에르병, 이제는 황반변성까지…. 까닭 없이 애먼 남편에게 원망의 화살이 돌아갔다. 하지만 백날 남 탓해 무엇하랴.
다음 날 아침, 의사의 말에 어깃장이라도 부리듯 산행을 강행했다. 허리에서 허벅지로 통증이 내려왔다. 어제 본 엑스레이가 자꾸 눈앞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영영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픔을 달래며 산모롱이에 다다랐다.
두 어르신이 서로의 안부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내 뒤를 따라왔다. 저것 봐, 저 아주머니,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건강한지는 모르겠으나 허리가 많이 휘었네. 어깨도 처지고. 점점 더 심해질 거야. 이렇게 멀리 올 상태가 아닐 텐데. 글쎄, 이럴 때는 쉬어주는 것도 약인데…. 설마 내 얘기는 아니겠지 싶었지만 모든 말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내내 그분들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돌아보면 쉴 틈 없이 살아오느라 몸의 호소에는 미처 귀 기울이지 못했다. 일상의 과부하가 통증을 몰고 왔을 것이다. 회한이 밀려왔다. 나는 나를 너무 과속으로 내몰았다. 열심히, 근면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질주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냥 사세요. 의사의 말은 내게 하나의 메시지가 되었다. 의사의 권고대로 조금이라도 이상 증세가 나타나면 일을 멈춘다. 오늘 다 못하면 내일 하면 될 일이다. 하루하루 의식적으로 허리를 곧게 펴고 어깨도 평형을 유지하려 애쓴다.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어주고 때론, 의사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휘어진 뼈처럼 삐딱했던 마음도 부드럽게 풀어본다. 갑자기 조급증이 밀려와도 천천히…. 하며 자신을 다스려본다.
니체의 걸음걸이는 느리기 한량없었다 한다. 철학자의 산보를 흉내 내며 새삼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햇빛 바른 마을을 걷기도 하고 오랜 이웃들과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전에는 맛보지 못한 즐거움이 은근하게 가슴에 차오른다.

EDITOR 편집팀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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