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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100」 따라가기
고래의 전설과 공단 굴뚝 사이 장생포의 시간이 흐른다
'복합문화공간 「장생포문화창고(A-FACTORY)」'

고래는 머리 꼭대기와 등 부근에 있는 숨구멍으로 숨을 쉰다. 물속에서 유영할 땐 숨을 힘껏 참았다가 수면 위로 떠올라 비로소 그 숨을 터뜨린다. 숨 쉴 때 공기와 함께 물줄기를 뿜어낸다고 해서 이 숨구멍을 분수공(噴水孔)이라고도 한다. 고래의 전설을 간직한 도시, 울산 남구 장생포에 이 분수공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이 있다. 문화가 숨 쉬는 곳이자 카타르시스의 공간, 장생포 바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복합문화공간 ‘장생포문화창고(A-FACTORY)’다.

책과 바다와 공장이 원근감 있게 펼쳐지는 장생포문화창고의 ‘지관서가 장생포’. 인문과 자연과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동력이 공존하는 도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공간이다.


쓸모 잃은 냉동 창고의 쓸모 있는 변신
장생포초등학교 맞은편, 외벽에 거대한 고래를 그려놓은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면 유리창을 통해 바다 풍경이 쏟아져 들어온다. 사각 프레임의 유리창마다 각기 다른 풍경이 걸린다. 바다라기보다 거대한 공업단지 사이를 파고든 수로(水路)처럼 풍경이 다채롭다. ‘장생포’는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과 동해·남해의 바닷물이 만나는 교차점 어디쯤에 있다. 탁 트인 바다 대신 억척스럽고 투박한 바다가 먼저 반긴다. 비릿한 바다 냄새 대신 기름내를 뒤집어쓴 바람이 악수를 청하기도 한다. 이 생경한 풍경에서 비롯된 낯선 감정들을 여과시켜주는 건 장생포문화창고다. 바다와 지역사, 예술, 인문 등 조합이 쉽지 않은 이 방대한 카테고리가 층마다 챕터를 넘기듯 펼쳐진다.

수산물 가공과 냉동 보관을 하던 ‘세창냉동’ 창고를 복합문화공간으로 되살린 ‘장생포문화창고’.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장생포문화창고는 수산물 가공 및 냉동 창고로 쓰이던 ‘세창냉동’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되살렸다. 건물 외벽엔 ‘제19회 대한민국 지방자치경영대전 문화관광분야 최우수상 수상’, ‘로컬100 선정’이라고 쓰인 자축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장생포문화창고는 2022년 개관 후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상설공연을 하고 해외 거장의 명화를 미디어아트로 재현한 전시로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에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음악 아카데미 등 체험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진행한다. 그간 다녀간 방문객 수만 30여 만 명. 개관 3년 차를 맞은 지금 장생포문화창고는 울산의 명소이자 젊은층 사이에선 누리소통망(SNS)의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았다. 장생포문화창고를 운영하는 고래문화재단 측은 “장생포문화창고라는 이름도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최종 선택된 것”이라며 “장생포의 지역명에 새로운 문화의 보물창고라는 뜻을 더했다”고 설명했다.
6층 건물은 층마다 이색 전망을 선물한다. 야경이 더 멋진 ‘공단 뷰’, 공장 담벼락에 그려놓은 커다란 고래 벽화, 포구의 완만한 곡선의 물길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풍경이다. 장년과 노년층에게는 자신의 젊음을 바친 산업화의 현장이고 젊은층에게는 ‘울산의 뷰 맛집’이다.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을 미디어아트로 만나볼 수 있는 3층 미디어아트 전시관.


2층에선 지역사, 3층에선 미디어아트 관람
안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층 탐방 게임’이 시작된다. 특이하게도 건물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1층에 푸드코트인 ‘어울림마당’이 자리 잡고 있다. 전망만 따지면 이곳도 뒤지지 않는다. 창가에 앉으면 정박한 선박들과 눈높이가 나란해 크루즈를 탄 것처럼 식사를 즐길 수 있다. 김밥과 돈가스 등 푸드코트 단골 메뉴뿐 아니라 숙성 카레, 해산물 덮밥, 코다리 밀면 등 특별식도 있다. 입점한 업체 3곳 모두 점심식사 시간인 오후 2~3시까지만 영업하니 참고하는 게 좋겠다.
2층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1962년 우리나라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울산공업센터 특정공업지구 기공식’이 장생포문화창고 인근에서 열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꾸민 기념관이다. 로비에 놓인 ‘한국공업입국출발지 기념비’는 1992년 기공식 30주년을 기념해 현장에 세운 것을 장생포문화창고 개관 후 옮겨왔다. 권태성 울산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울산공업센터는 우리나라 발전의 시발점이자 마중물 역할을 한 곳”이라며 “울산이라는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곳 전시관을 꼭 한번 둘러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생포를 상징하는 고래 작품을 볼 수 있는 4층 시민 창의 광장.


산업화의 그늘 뒤 도시의 주름을 보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발파 버튼 체험을 시작으로 근현대사에 기여한 울산 지역사가 전시품, 자료 등을 통해 탐방객과 만난다. 과거 산업기사들이 입었던 작업복, 산업화를 거치며 고향을 떠나야 했던 울산 주민들의 이야기, 공업화에 따른 환경오염 등 그늘진 이면과도 대면할 수 있다. 신기하게도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굴뚝이 즐비한 ‘공단 뷰’가 새롭게 보인다. 공단의 굴뚝도, 회로도처럼 촘촘하게 얽힌 공업용 배관들도 산업화를 위해 많은 것을 감내해야 했던 이 도시의 주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3층 미디어아트 전시관에선 기분 전환을 삼을 만한 전시가 기다린다.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활용한 미디어아트 전시를 상시로 볼 수 있다. 전시관 밖 ‘반구대 암각화 고래의 비밀’ 등 터치스크린 콘텐츠는 미디어아트 상영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의 차지다. 전망과 콘텐츠 구경을 하다보면 대기시간이 금방 간다.
4층은 공공 예술과 시민 참여 예술 광장으로 꾸몄다. ‘2020 아트팩토리’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는데 나무로 만든 대형 설치 작품 ‘하늘을 나는 고래’를 시작으로 출구 방향의 ‘빛의 방’까지 돌아보는 데 20~30분이면 충분하다. 벽면을 장식한 대형 작품만 쓱 훑어보기보다 전시장 안쪽 그림들을 눈여겨보길 권한다. ‘고래처리장’, ‘고래막집’, ‘장생포 옛길’을 담은 그림들이 산업도시 이전 장생포의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장생포는 일제강점기 포경산업의 중심지였다. 포경산업은 사라졌지만 장생포문화창고를 포함해 일대가 장생포고래문화특구로 지정돼 있다. 전시 그림들은 포경산업이 남긴 장생포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그림 속 일부 장소는 실제 장생포문화창고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간 김에 둘러볼 만하다.
일몰 보고 별빛마당에서 마침표를
공유 작업실과 공연 연습실로 쓰는 5층을 지나 6층에 이르면 또 다른 바다가 나온다. ‘사유의 바다’로 불리는 북카페 ‘지관서가(止觀書架) 장생포’다. 지관서가라는 이름엔 ‘내 안의 소리를 멈추는 곳, 나와 세상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인문과 예술과 산업의 이질적인 사상과 관점들이 서로 만나고 대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재탄생하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소개 글처럼 책을 통해 지혜를 더하고 독서와 낭독 모임을 통해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여기에 매달 수준 높은 인문학 강연을 이어오며 복합문화공간으로 뿌리를 내렸다. 이런 곳에서 장생포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리는 건 호사처럼 느껴진다. 장생포의 테마인 ‘일(Work)’ 관련 책과 울산 관련 책, 울산 작가가 쓴 ‘울산 도서’ 등도 다양하게 추천해놓았다.
하루 중 어느 때나 좋지만 맑은 날 해 질 녘 서쪽 창가에 앉으면 이 특별한 포구를 붉게 물들이는 인생 일몰과 조우할 수 있다. 이곳의 일몰은 지난 시간을 복기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느끼게 한다.
지관서가가 끝이 아니다. 엘리베이터는 6층까지만 운행하지만 ‘피아노 계단’을 따라 7층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1층부터 곳곳에 고래 그림과 이야기를 접했기 때문일까? 한 발 한 발, 피아노 소리를 밟고 올라 옥상인 ‘별빛마당’에 닿으면 고래 뱃속을 탐험한 후 분수공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때쯤 장생포는 노을의 품 안에서 이질적인 풍경을 덮고 너그러운 시간을 맞이한다. 색깔이 바뀌는 장생포의 풍경과 함께 바다에 고요가 머무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행에 마침표를 찍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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