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 여행]
흥덕사지 발굴 이야기-1부
'숨겨진 운천동 이야기- 구루물 산책'

‘구루물 산책’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여행]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행본입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천동의 숨겨진 다채로운 발굴 이야기를 흥덕사지를 발굴한 지역 전문가를 통해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엮은 책입니다.
Cheapter3. 흥덕사지 발굴 이야기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을 흐르는 무심천을 앞에 두고, 무심천과 나란히 남북으로 줄기를 내린 양병산 동남쪽 기슭에 터를 잡은 흥덕사는 일찍이 1377년(고려 우왕 3)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 「직지」를 비롯하여 「자비도량참법집해」 등을 금속활자로 간행해낸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의 성지이다.
운천동 지역은 일찍이 1970년에 신라 동종이 발견되어 보물로 지정된 바 있고, 198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운천동 신라사적비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본래 운천동에 속하였던 지금의 사직1동 용화사에는 7기의 거대한 석조불상이 남아 있어 역시 청주의 대표적인 불교유산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곳은 다량의 청동유물이 출토되어 옛 사뇌사 터로 밝혀졌다. 이처럼 운천동은 예전에 ‘팔만구암자’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많은 사찰이 밀집되어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말기까지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것은 무심천을 끼고 있는 지리적 환경에 의한 것으로 당시에는 행정과 문화의 중심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봉림수(鳳林藪)이다. 봉림수는 북쪽이 허한 운천동을 병풍처럼 감싸고 보호하기 위한 인공조림으로 여러 사찰의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흔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넓은 들판을 앞에 두고 몇 개의 마을이 옹기종기 자리하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1984년에 한국토지개발공사(지금의 LH)가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시행하는 중에 이름 모를 절터가 발견되어 발굴한 결과 흥덕사지로 밝혀짐으로써 오늘의 흥덕사지가 있게 되었고, 아울러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생겨나고 이곳에서 인쇄된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발굴 과정과 결과
청주시 운천동 일대는 일찍이 신라말기부터 불교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옛 절터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문헌에 나타나지 않아 학술적인 연구는 차치하고 지표조사조차 제대로 실시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1984년 12월부터 한국토지개발공사(지금의 LH) 충북지사가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게 되자 충청북도에서는 개발 사업에 앞서 신라 동종 등의 불교유물이 출토되어 이미 알려져 있던 운천동사지에 관한 발굴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 해 11월부터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뢰하여 운천동사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흥덕사지 발굴 후 전경



당시 발굴조사단의 조사원으로서 현장의 실무를 맡았던 박상일(朴相佾) 연구원이 주변 유적지에 관한 관심을 갖고 틈틈이 조사를 하던 중에 운천동사지 서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연당리 가강골 마을 515-1번지의 개인 묘소 주변에서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원형과 방형의 초석 3기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미(?尾)편 및 연화문 또는 당초문이 새겨진 와편을 수습하는 등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옛 절터를 찾아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현지조사와 평판측량을 실시하여 간단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충청북도에 제출함과 아울러 이 지역이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적절한 보존조치와 발굴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1985년 1월 충청북도에서는 한국토지공사 충북지사에 이 사지의 보존을 위해 사지 일대의 공사 중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으나, 한국토지개발공사 충북지사는 공사를 계속하여 이 사지의 중심에 해당하는 금당지의 유구가 있는 곳까지 흙을 반출하여 택지를 조성함으로써 사지의 원상을 크게 훼손시켜 유구가 파손되었을 뿐 아니라 유물들이 유실되고 말았다.
한편,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는 1985년 3월 이 사지에 대한 긴급발굴을 결의하였고, 그 해 6월에 청주대학교박물관이 이 절터의 이름을 옛 지명을 따서 ‘연당리사지’라 명명하고 충청북도에 발굴조사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충청북도에서는 7월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발굴허가를 받아 7월부터 10월까지 청주대학교박물관에서 훼손되지 않고 잔존한 서반부의 지역을 대상으로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左) 흥덕사지 금강저 右) 흥덕사 명 금구의 글씨



발굴조사 결과 옛 절의 가람배치를 밝힐 수 있는 건물터를 대부분 찾아내고 기와, 토기, 청자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편으로 사지에서 반출된 흙으로 조성된 택지에서는 청동소종(小鐘), 청동금강저(金剛杵), 청동금구(禁口) 등을 비롯한 불기(佛器) 25점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는 사지의 유구를 조사하여 사찰의 원상을 밝히는 것은 물론 출토유물을 통하여 잃어버린 사찰의 이름과 역사를 찾는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유물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지의 발굴 결과 이곳에 있었던 사찰은 대략 9세기에 창건되어 14세기말 또는 15세기 초까지 존속하였으며,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후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지의 동반부가 이미 파괴된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발굴결과 확인된 유구는 동남쪽 일부가 손상된 금당지, 그리고 원상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서쪽 회랑(回廊)과 회랑 끝에 붙은 벽돌 깔은 건물지[敷塼建物址] 등 주로 전체 사역의 서북반부 지역이었다. 그러나 사지의 성격상 좌우 대칭으로 건물배치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사찰의 원래 모습을 대부분 추정하여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발굴조사를 거의 끝내고 주변을 정리하던 1985년 10월 8일에 택지공사로 훼손된 사지의 동쪽에서 ‘갑인년 5월에 서원부의 흥덕사에서 금구 1개를…(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臺座…)’이라는 내용의 글씨가 새겨진 청동금구와 청동불기 등이 출토되어 이 절터가 바로 1377년(고려 우왕 3)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 「직지」와 그 시기를 전후하여 「자비도량참법집해」를 인쇄한 흥덕사지(興德寺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흥덕사지를 확인한 발굴조사단은 곧바로 1985년 10월 10일 관계당국에 흥덕사지 확인에 따른 사지의 보존조치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자 문화공보부에서는 흥덕사지 일원에 대한 개발중지 및 보존지시를 내리고 문화재위원을 파견하여 사지와 유물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10월 30일에는 흥덕사지 주변 4,598평이 사적지로 가지정되는 보호조치가 취해지고, 1986년 4월에 문화재위원회의 결의를 걸쳐 5월 7일에 흥덕사지 10,711평이 사적 제315호로 지정공고 되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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