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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페이지가 없는 공간

2023-06-14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페이지가 없는 공간
'글. 최명임'

    비의 흔적이 풀숲에 남아 초록이 더욱 짙다. 제 모습으로 돌아간 봄이 오랜만에 여유를 부리는 날이다. 허연 마스크에 의지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나도 들숨과 날숨이 한결 수월해졌다.
지효랑 지율이를 데리고 금강 수변공원에 들렀다. 미세먼지가 창궐하는 날은 창가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그런 날은 강변도 숨을 죽이고 있는 듯하다. 삭막한 도심 속에 자리 잡고 있어도 그곳에 가면 호흡이 자유로워진다. 두 녀석도 그 유혹을 못 이겨 하교하는 길에 미세먼지 상태를 먼저 묻는다. 공기가 맑은 날은 틀림없이 내가 저들을 이끌고 강변으로 나서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 제 어미는 숙제를 미처 못 하고 학원에서 졸고 있다고 걱정하지만, 아이들이 강변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 않을 거다. 족쇄를 채워놓고 ‘달려라, 달려!’ 외치는 대한민국 가엾은 어미들의 불안 심리에서 나오는 걱정일 테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돌파구를 열어주고자 시간을 내기로 작정했다.
    하루가 고요히 지나가는 이곳은 바람에 홀린 억새와 수크렁이 아름다운 소란을 피우고, 부리는 이 없어도 이루어지는 것이 많은 공간이다. 꽃, 바람, 숲, 물, 운동을 주제로 구간마다 몫몫이 조성된 수변에는 사람이 주인인 것 같지만, 잠시 들러 여백의 은은한 바람 소리를 듣고 가는 객에 불과하다. 한 블록 건너 북새통에 사는 사람들이 이념의 벽을 넘어오듯 자주 이 평화의 공간을 넘나드는데 이곳에 서면 만사가 형통할 것처럼 느긋해진다.
    걷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린다. 자전거나 다부진 두 다리로 달리는 이들도 있는데 자신에게 정성을 들이는 모습이라 결딴을 내어야 할 것처럼 숨차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닌다. 아이들이 뛰는 것은 곧 걷는 것이라 페이지가 없는 공간을 즐기는 것이다.
 

    책 첫머리에 끼워둔 한 두어 장 여백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차 한 잔의 여유와 같아서 페이지가 없다. 탈고를 끝낸 작가가 마침내 손을 털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며 “차 한잔하실까요?” 하는 부드러운 음성이 묻어있다. 그 무한의 공간에 채워진 것이야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첫 장을 넘기면서 바로 문장이 시작된다면 누구든 숨이 찰 것이다. 작가의 철학과 심층에서 솟아오른 언어와 은유로 덮어둔 그의 세계로 들어서려면 적어도 여백 두어 장은 있어야 수월하겠기에 배려인 거다.
    강변도 페이지가 없는 공간이다. 거친 숨소리 들리는 도심이 한 획이라면 강변은 여백이다. 저 소란의 세계로 진입하기 전 심호흡을 하는 공간이다. 충분히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 들어서도 움츠려지는 곳, 북새통에서 살아남으려면 마음에도 여백 한 곳은 남겨두어야 하리라.
    들릴 듯 말 듯 흐르는 강물이 주류를 이룬다. 아이의 종알거림과 새소리가 화음을 맞추고, 잡초가 열 일 제쳐놓고 꽃을 피우는 곳, 초록이 빛깔 익히느라 바쁜 강 뜰에 바람이 흐벅지다. 발걸음 소리조차 소음이 되는 곳에 푸르르 꿩 한 마리가 놀라 날아오른다. 덩달아 놀란 박새의 비명이 소음이 아닌 곳, 요란한 풀벌레 소리가 소란스럽지 않은 곳에 초록으로 뭉뚱그려놓은 풀밭은 카펫처럼 포근하다. 나른한 봄을 베개 삼아 몸을 누이고 싶다. 자세히 보니 이름 모를 잡초가 암팡진 꽃을 달고 해의 방향성을 찾아 고개를 기웃거린다. 안경을 썼으니 망정이지, 벗고 보면 도저히 볼 수가 없는 아주 작은 풀꽃도 뭉뚱그린 초록 속에서 생의 의지가 불꽃 같다.
    “나, 여기 있어!”
    또래 아이를 불러놓고 도란도란 이야기 정겹다. 생애 찬란한 하루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부담스럽지 않다. 아이들이 풀밭에서 통통 튀는 걸음으로 발짝을 떼놓는데 파르르 봄이 흩어진다. 민들레 갓 털 저 하얀 보풀이 지는 봄이다. ‘어제 야속한 꽃가루도 가는 봄이었구나.’ 저 박새 소리 물오른 걸 보니 오는 여름을 알아챘다.
    계절이 가고 오는 소리가 들리지만 조급하지 않다. 아이가 크는 소리, 사랑이 깊어가는 소리, 비우는 소리, 채우는 소리, 한 블록 건너 저 소란을 무마하는 실살스러운 바람 소리로 가득 차 있다. 넘치도록 채워져 있음에도 가벼운 이 느낌은 무엇일까.
    보일 듯 말 듯 아주 작은 풀꽃들조차 제 생의 예찬으로 아름다운 공간에 사람들이 수월찮은 무게를 내려놓고 떠난다. 한동안 일상이 수월하겠다.
    아이들 심장 박동 소리가 해 저무는 강변을 흔들고 있다. 저만치 달아난 녀석들 웃음소리가 강 뜰을 휘젓고 다니는데 길 건너 소란의 세계에서 끈덕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