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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돌보미

2022-05-18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돌보미
'글. 박순철'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가정의 달! 
    “우리 부모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게 해주십시오”
    “우리 아들딸, 그리고 손주들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게 해주십사”라며 기원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귀여운 손주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들떠있는 달이기도 하다. 
    지금은 삼대(三代)가 한집에 사는 예가 드물다. 소갈 씨네 가정도 아들은 직장이 있는 서울에 살고 있으니 집에 한 번 다녀가기가 쉽지 않다. 명절 때, 또는 두 내외 생일 때 다녀가는데 생일 때는 내려오지 말라는 게 소갈 씨 내외의 당부다, 하지만 아들 며느리는 그 명을 어기고 꼭 내려온다. 아들한테서는 덩치가 제 아비보다 더 큰, 고등학교 1학년과 3학년인 손자만 두 명이다. 조용하던 집안에 녀석들이 들이닥치면 거실이 비좁아 보인다.
    딸은 집 가까이 살고 있고 남매를 두었는데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이다. 더구나 가까이 살고 있어 보고 싶으면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둘이 직장을 다니니 아내가 어린 외손주들을 돌보며 살림을 도맡아 해주고 있다. 어느 날은 자정이 다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딸아이 내외가 회식이나 특근하는 날로, 1년에 한두 번은 있는 것 같다. 힘은 들어도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떨어져 사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아내는 입에 달고 산다. 첫달에는 사위가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쓴 봉투 내민 것을 거절했더니 그다음부터는 일체 말이 없다. 
    “엄마! 올 어버이날에는 우리랑 제주도 여행 가요. 저희가 이번에는 엄마 아빠 제주도 구경시켜 드리기로 했어요.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작년에 모시고 가서 구경시켜 드렸는데 무척 좋아하셨어요. 애들 아빠 회사 휴양시설이 제주도에 있는데 이번에 신청했더니 다행히 당첨되었어요.”
    제주도 가 본 지가 언제였더라. 아득했다. 말만 들어도 설레었다. 말단 직원 봉급에서 아들딸 교육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해외여행 한번 못하고 지내온 소갈 씨! 물려받은 재산이 많던가 남들처럼 봉급이 많은 직장에 다녔다면 아내에게 철 따라 유행하는 예쁜 옷도 사 주었을 것이지만 그러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린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맙습니다. 저희 이제 어린이 아니에요. 돈 안 보내 주셔도 돼요.”
    “녀석들! 그래 다 컸구나.”
    어린이날을 맞아 소갈 씨가 서울에 있는 손자들에게 5만 원씩 입금하고 영상 통화를 시작하자 손자들의 커다란 얼굴이 화면 가득 담겨왔다. 우렁찬 녀석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났다.
    “할아버지! 형이랑 이번 주 토요일에 내려갈 거예요. 저희가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안마도 해드리고 맛있는 요리도 해드릴게요.”
    “고맙기는 하다만 너희들이 무슨 돈이 있냐?”
    “이럴 때 쓰려고 평소에 용돈을 조금씩 아껴서 준비해왔어요.”
    “요리도 할 줄 알아?”
    “네. 저는 라면 잘 끓여요.”
    “이 녀석아, 라면 못 끓이는 사람도 있든?”
    “많아요. 우선 우리 아빠도 라면 못 끓여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라면 못 끓이신다는 소리 들었어요”
    “허 허 허 그 녀석, 언제 그런 것까지 알았다냐?”
    소갈 씨가 라면을 아주 못 끓이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아내가 모임에 갔다가 늦게 돌아오거나 딸네 집에서 자고 오는 날에는 가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지만, 그런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잘못 전달된 내용이기도 하다. 아들 역시 소갈 씨를 닮았으니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고부(姑婦)가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을 녀석들이 들었나 보다.
    “고맙구나. 하지만 올해는 너희들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하겠구나. 이번 어버이날은 너희 고모가 제주도 여행시켜주겠다고 했다. 다음에 먹으마.”



    토요일! 제주도로 향하는 소갈 씨네 가족은 싱글벙글이다. 비행기 동체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섬들은 마치 파란 물감을 칠한 커다란 모조 전지에 연필로 점을 찍은 듯 거뭇거뭇했고, 하얀 융단을 깔아 놓은듯한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은 요즘 어린이들 말처럼 ‘기분 짱’이었다. 외손자 옆에 앉은 소갈 씨의 표정이 한없이 행복해 보인다. 소갈 씨가 결혼할 때에는 언감생심 제주도 신혼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주도 여행이 처음은 아니다. 직장 동료들과 매달 얼마씩 저축한 돈으로 제주도 여행길에 올랐을 땐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더니 정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두 번 아내와 같이 제주도에 다녀온 기억은 있지만, 오래전 일이다.
    소갈 씨 옆에 앉아서 손을 잡아주는 외손자가 오늘따라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앞으로 남은 날이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행복 영원히 깨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옆자리를 바라보니 아내 역시 외손녀를 끌어안고 둘이서 무슨 이야기인지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가까운 바닷가로 향했다. 햇볕은 따뜻한데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몰아치는지 잘못하다간 날아갈 것 같아 소갈 씨 부부는 손주들 손을 하나씩 잡고 보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딸과 사위는 언제 챙겨왔는지 반바지 반소매 차림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모습은 영락없는 와이키키 해변의 피서객이었다.
    “아빠! 제주도 오시니까 어때요?”
    “좋다. 너희들 덕분에 제주도를 또 와보는구나!”
    “아버님! 오늘 저녁은 횟집보다는 꺼먹돼지가 유명하다고 하니 거기로 모시겠습니다.”
    “아무렇게나 하게. 우리는 다 잘 먹으니까 상관없네.”
    제주 토종이라 불리는 꺼먹돼지는 맛도 좋았다. 사위와 딸이 권하는 대로 술을 받아마신 소갈 씨 얼굴이 벌게지며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술 맛있어?”
    큰 손자 녀석이 소갈 씨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아니, 너도 술을 먹을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사위와 딸은 음식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저, 엄마 오늘 애들 좀 데리고 있어, 우리 어디 갔다 올 데가 있어.”
    “그러려무나. 어딜 가는데?”
    “응, 오늘 서울에서 내려온 애들 아빠 본사 직원들 가족과 미팅이 있데.”
    소갈 씨는 숙소에 돌아와 샤워하고 술김에 이내 쓰러져 잠에 빠져들었다. 한 30분쯤 잤을까. 무슨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 일어나보니 아내 혼자서 손주들을 데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고 하고 있었다. 큰 손자는 저녁 먹은 게 체했는지 휴지통 앞에 앉아서 토를 하고, 두 살짜리 손녀는 아내 등에 업혀서 칭얼대고 있었다.
    ‘이런, 제주도 구경시켜준다고 데려오더니, 그나저나 이일을 어쩐담. 모임에 간 애들을 부를 수도 없고…. 이제는 너희 엄마 그만 좀 괴롭혀라.’
    기분 좋게 마신 술이 소갈 씨 마음을 또 한 번 휘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