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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엄마 생각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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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엄마 생각
'글. 유병숙'

    불광역에서 내려 지하도를 빠져나왔다. 집에 가려면 버스를 두 번 더 갈아타야 한다. 횡단보도에 서서 초록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하늘에는 휘영청 달이 밝았다. 친정에서 돌아오는 내내 엄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새 달에도 엄마의 얼굴이 떠 있었다.
    얼마 전 엄마는 침대에서 내려오다 또 넘어졌다. 아침에 막내가 발견할 때까지 밤새 맨바닥에 누워계셨다. 이런 참담한 지경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엄마의 낙상은 수시로 이어졌다. 여동생들이 친정 가까이 살고 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의사는 이번에는 갈비뼈에 금이 갔으니 복대를 하고 가급적 누워계시라 당부했다. 통증이 심한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 와중에도 연신 밥은 먹었니? 밥 먹어야지, 하며 나를 챙겼다. 
    삼 년째 이어지고 있던 엄마의 식사 수발이 식구들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노쇠해진 엄마는 숟가락과 식기들을 모두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아침은 막내가, 점심은 요양사가, 저녁은 둘째 딸이 분담하고 있었다. 특히 둘째는 반찬까지 담당하고 있어 수고가 여간 아니었다. 멀리 사는 나는 마음만 굴뚝이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동생들도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집안의 종손인 사촌 오빠가 근래 엄마의 병세를 자주 챙겼다. 하루는 내게 전화하셔서, 이렇게 엄마를 방치하지 말고 서둘러 요양원으로 모시는 게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뇌졸증과 파킨슨병이 함께 찾아온 새언니를 수년간 손수 병간호를 챙겼던 오빠였기에 당연히 엄마를 집으로 모셔 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연전에 새언니를 하늘나라로 보낸 오빠는 막바지에 다다르자 체력의 한계가 왔다고 고백했다. 뒤늦게라도 요양병원으로 옮겼더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하며 울먹였다. 오빠의 순애보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팔순 중반을 훌쩍 넘어선 엄마는 요양원에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내가 치매를 앓고 있는 시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자 더 성화가 심했다. 항간에 떠도는 나쁜 이미지를 가감 없이 말씀하셔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엄마와 시어머니는 절친하게 지냈던 사돈지간이었다. 엄마의 동병상련이 인지상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동생은 미국에서 살고 있고, 나는 남편을 간병하고 있는 상태이고 여동생 또한 시아버님의 병간호 중이었다. 대학생 자녀를 둔 막내 여동생은 당분간 맞벌이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4남매를 키우셨지만, 사방을 돌아봐도 엄마 한 몸 평온하게 모실 곳이 없었다.
    엄마에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걱정이 되었다. 오빠가 그러는데 하고,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종손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의지했던 엄마였지만 상심의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는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걸 엄마라고 왜 모르겠는가. 동생들은 맏이인 내 결정에 무조건 따르겠다고 나섰다. 여동생들도 안쓰러웠지만 무던하게 배려해주는 제부들에게 미안해 더는 안 될 일이었다. 요양원부터 알아보자고 했다. 우선 엄마의 종교를 배려해 가톨릭 신자인 교우가 운영하는 요양원에 가 보았다. 도심과는 사뭇 풍광이 달랐다. 넓은 잔디밭에는 평상과 벤치가 있었고 성당처럼 성모마리아 성상이 서 있었다. 깔끔한 외관의 3층 건물에는 방마다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외부인의 내부 출입은 통제되었다. 마당에 설치된 상담소에서 원장이 우리를 맞았다. 정성스럽게 상담을 해주어 믿음이 갔다. 마침 한 보호자가 면회를 왔다.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와 의자에 앉은 아들이 유리벽을 사이로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남의 일이라 여겼던 그 광경을 앞으로 겪으려니 가슴이 철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생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요양원에 계시다가 상태가 좀 나아지면 다시 집으로 모셔오자.” 동생을 달랬다. 시어머니는 정신이 없어서, 엄마는 정신이 있는데도 요양원에 모셔야 할 처지에 놓였다. 무슨 팔자가 이럴까? 생각할수록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요양원 입소 절차의 하나인 등급조정 신청을 하였다. 심사 완료까지 제법 시간이 흘러갔다. 그사이 연일 천여 명이 넘는 확진자 속출 뉴스가 이어졌다. 우려한 대로 코로나19의 3차 대유행이 시작되었다. 특히 요양 시설에 계신 어르신들이 위험하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감염을 막고자 당분간 보호자의 면회는 전면금지 되었다.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엄마의 요양원행은 무산되었다. 우리의 소망은 엄마의 24시간 보호와 하루 따뜻한 밥 세 끼였다. 그 바람이 이토록 어려운 일일 줄은 미처 몰랐다.
적막한 정류장에 속절없이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이를 더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도 아니고, 누구에게 투정을 부릴 일도 아니다. 젊음이 투쟁에 의해 얻어진 노획물이 아니듯, 늙음도 잘못의 대가로 받은 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가 윤재천 교수의 글이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갔다. 지금의 엄마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는 여전히 우리를 하나로 묶는 든든한 울타리였다. 마음의 끈을 다시 질끈 동여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