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려드린 궁중 약차 ‘오미자다(五味子茶)’는 신맛, 단맛, 쓴맛, 짠맛, 아린 맛 등 다섯 가지 맛을 느낄 수 있는 차이옵니다.”
정갈하게 빗어 쪽 찐 머리에 한복을 차려입은 궁중 나인(內人)이 오미자차를 설명한다. 복장부터 말투까지 조선시대에서 시간여행을 온 것처럼 어색함이 없다. 나인이 올린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은 경복궁 생과방(生果房)이다. 생과방은 조선시대 왕실의 후식과 별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직접 우린 차와 함께 나인이 가져다준 왕의 간식 한 상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은 왕의 간식을 맛볼 수 있는 ‘경복궁 생과방’ 행사를 2016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경복궁 소주방 전각에 위치한 생과방에서 궁중 다과와 약차를 즐기는 유료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는 6종의 다과, 1종의 궁중 약차로 구성된 궁중 다과세트를 맛볼 수 있다. 매년 상·하반기 두 차례 열리는데 인기가 높아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올해 상반기 ‘경복궁 생과방’은 4월 16일부터 6월 23일까지 진행된다. 경복궁이 휴궁하는 매주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4차례 열린다. 지난해보다 늘어 하반기까지 총 456회가 열린다. 회당 참가자는 36명이다.
‘경복궁 생과방’ 행사는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경복궁 생과방에서 궁중 다과를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사진. C영상미디어)
올 첫 ‘경복궁 생과방’ 행사에 ‘K-공감’이 다녀왔다. 생과방은 광화문을 거쳐 주 출입구인 흥례문보다 삼청동 입구 쪽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가깝다. 박물관과 가까운 매표소에서 경복궁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니 곧바로 생과방으로 통하는 길목이 보인다. 3분 남짓 걷다 보면 내소주방, 외소주방과 어깨를 마주한 생과방 입구가 나온다.
행사 시작 전부터 관광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생과방 안쪽을 들여다봤다.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예약자만 이용할 수 있다는 안내에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시작 10분 전부터는 예약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예약자를 확인하는 안내 테이블 위에는 그날 체험할 다과와 차를 그림과 함께 소개한 안내문이 놓여 있다. 어떤 차를 마실지 선택할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병 속에 차 재료들을 넣어놓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예약자 확인을 마치자 차비(差備) 복식을 한 진행 요원이 안내에 나섰다. 차비는 조선시대 궁중의 주방에서 실무를 담당한 하위 계급의 나인이다. 옥빛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은 나인들이 왕을 모시듯 예를 갖춰 체험객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마다 푹신한 방석이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를 감안한 듯 고운 비단으로 만든 담요도 놓여 있었다. 건물로 둘러싸인 안쪽 뜰 한쪽에 심겨진 꽃과 나무가 운치를 더했다. 체험객들은 대부분 가족, 연인, 친구 등과 함께 방문했다. 모녀 사이도 눈에 많이 띄였다.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기러 온 체험객도 있었다.
채험객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찻잔과 주전자, 다과세트만 올려놓아도 꽉 차는 앙증맞은 소반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생과방 앞쪽으로는 고즈넉한 안뜰의 풍경이, 뒤창으로는 인왕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한국 전통음악이 서정을 더했다.
아름다운 궁중 다과에 오감이 즐겁다 잠시 후 나인들이 준비한 차와 다과를 날랐다. 다과는 주악세트, 곶감오림세트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오미자과편, 잣박산, 매작과를 공통으로 주악세트는 주악·다식·사과정과로, 곶감오림세트는 곶감오림·약과·금귤정과로 구성돼 있었다.
‘경복궁 생과방’ 행사에서 맛 볼 수 있는 디저트. 곶감오림세트와 주악세트 (사진. C영상미디어)
이 중 오미자과편과 곶감오림은 올 행사에서 처음 선보인 다과였다. 오미자과편은 궁중 연회상에 올린 다과 중 하나로 궁중의 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와 ‘진연의궤(進宴儀軌)’에 ‘오미자병’으로 기록돼 있다. 과편은 신맛이 나는 과실을 끓여 녹말을 풀고 되직하게 굳힌 다과를 말한다. 곶감오림은 말린 곶감을 꽃잎 모양으로 오려내고 잣으로 꽃술을 표현한 음식이다.
차는 감국다, 삼귤다, 감길다, 오미자다 등 네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맛볼 수 있었다. 감길다(甘吉茶)는 ‘경복궁 생과방’ 행사에 처음 추가된 차로 인후통으로 인한 증상을 완화하는 탕약이다. ‘승정원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과와 차의 종류를 선택하자 나인이 조선시대의 어투로 준비된 다과를 설명했다. 각각의 이름과 맛있게 먹는 방법, 주의사항 등이었다.
다과는 단맛이 과하지 않고 적당하면서 담백했다. 특히 잣으로 만든 강정 종류인 잣박산은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이 이 맛에 반해 시를 지었다는데 과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귤을 달콤하게 조린 금귤정과도 쫀득하고 달콤하면서 상큼해 젤리를 먹는 것 같았다. 도라지와 감초 두 가지 약재로 끓인 감길다를 선택했는데 단맛보다는 도라지 특유의 씁쓸한 맛이 강하면서도 오묘했다. 달콤한 다과에 곁들이니 입맛이 개운해졌다.
다과상에는 차패(茶牌)에 달린 고급스러운 매듭장식, 한산모시로 짠 찻잔 받침, 음식을 찍어 먹을 수 있는 다과 꽂이 등 눈을 즐겁게 하는 장식품들이 놓여 있었다. 모두 국가유산청의 ‘국가무형유산 전승취약종목 활성화 지원사업’을 통해 제작된 전승취약종목 이수자들의 공예품들이었다. 이 밖에도 장인들이 만든 장식장, 문갑, 가방, 촛대 등이 공간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자리마다 놓인 푹신한 방석과 담요가 체험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나인 환대 받으며 시간여행‘경복궁 생과방’ 행사는 회차당 70분간 이어진다. 퇴장은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체험객은 끝나는 시간까지 머물렀다. 나인, 차비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머니와 함께 한복을 입고 온 김한희 씨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충북 청주시에서 이른 아침부터 올라왔다고 했다. 김 씨는 “정년퇴직한 엄마와 전국의 국가유산들을 둘러보는 중”이라며 “경복궁에서 궁중 다과를 즐기는 추억을 남길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강원도에서 온 임도경 씨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된 행사인데 우리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일반 예매를 해서 찾아왔다”며 “다과도 맛있고 안내를 도와주는 분들의 말투와 행동도 이색적이고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나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궁궐에서 즐기는 미식여행은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다. 궁궐의 마룻바닥에 앉아 정갈한 다과상을 앞에 두고 먼 산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다보니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외국인도 영어로 진행되는 별도 회차를 통해 참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