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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간이역 동화 속으로 출발합니다

202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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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간이역 동화 속으로 출발합니다
'화랑대철도공원(노원불빛정원)'

    2010년 12월 21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경춘선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이 문을 닫았다. 1930년 7월 20일생으로 70여 년 동안 사람들을 맞고 보내던 역의 수명이 다한 것이다. 폐선이 된 철로에서 한 발짝 떨어져 우두커니 자리를 지켜오던 이 간이역이 2017년 ‘화랑대철도공원(노원불빛정원)’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서울 동북부의 핫플레이스로 등극한다. 텅 비어 있던 철로엔 이색 기차들이 자리하고 매년 역을 중심으로 음악회와 맥주축제가 펼쳐진다. 시민들의 힐링 공간이 된 서울 노원구 ‘화랑대역’ 얘기다.

 
일본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눈 오는 날 ‘화랑대철도공원’의 히로덴 전차.
소유주인 히로시마전철(주)로부터 무상양도받아 화랑대철도공원에 전시하고 있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골목 탐방의 시작점
    “할아버지! 여기는 왜 기차들이 다 가만히 서 있어요?”
    “응, 여긴 오랫동안 열심히 달렸던 ‘할아버지 기차’들이 쉬는 곳이거든.”
    “아하! 그럼 할아버지 기차가 되면 다 여기로 오는 거예요?”
    “아니, 여기는 아주 특별한 할아버지 기차들만 오는 곳이란다. 일본에서 온 기차도 있고 체코에서 온 기차도 있대. 한마디로 할아버지 기차박물관인 거지. 가만 보자, 할아버지랑 나이가 똑같은 기차가 어디 있다던데?”
    1월 19일 해 질 녘 화랑대철도공원. 탐방객 신기수 씨와 여섯 살 외손녀 이유주 양이 두 손을 꼭 잡고 옛 경춘선 폐철길을 걸으며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마치 한 편의 그림 동화책을 펼친 것만 같다. ‘할아버지 기차들이 쉬는 곳’이라는 표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행여 들킬까 고개를 돌렸더니 영화 ‘철도원’ 속에서나 본 것만 같은 오래된 기차와 1970~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가 현실 속으로 튀어나온 듯한 증기기관차가 눈앞에 떡하니 서 있다. 서울 광진구 서울어린이대공원(구 능동어린이대공원)에 있던 1950년대 ‘미카 증기기관차’다. 물론 ‘은하철도999’의 증기기관차와는 외관만 닮았을 뿐 기종은 다르다. 미카 증기기관차는 화물용으로 도입돼 우리나라에서 1919년부터 운행돼오다 1967년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퇴역했다.

 
左.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이었던 화랑대역사는 밤이면 미디어아트로 수놓아진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右. 등록문화재인 화랑대역사는 ‘화랑대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2017년 12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건너온 히로덴 전차도 있다. 히로덴 전차는 은퇴 후 2017년 말 폐차될 예정이었으나 노원구가 이 전차의 소유주인 히로시마전철(주)에 전시 의사를 전달하면서 무상양도 조건으로 화랑대철도공원에서 말년을 보내게 됐다. 아날로그 감성의 히로덴 전차는 사진 동호인들에게 특히 인기다. “이곳만의 감성이 좋아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찾고 있다”는 사진 동호인 조성규 씨는 “눈 오는 날 철길에 설경까지 더해지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감성의 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기차만 전시해둔 게 아니라 각 기차의 내부에 직접 들어갈 수도 있다.
    반쯤 빨간색을 두른 체코 노면 전차는 화랑대철도공원을 이국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일등 공신이다. 내부는 ‘트램 도서관’으로 꾸며져 누구든 기차에 올라 책을 읽을 수 있다. 공원 입구 쪽에는 귀여운 꼬마열차, 협궤열차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노면 전차 모형 등이 옛 경춘선 폐철로를 따라 이어진다.
추억이 전시된 ‘화랑대역사관’
    화랑대철도공원(노원불빛정원)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로컬100’ 중 ‘지역 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공원은 등록문화재인 화랑대역 일대 4만 462㎡ 부지를 2017년 철도 테마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20일 ‘태릉역’으로 영업을 개시하고 1958년 ‘화랑대역’으로 개명했다. 이후 화물 취급 중지와 개시를 반복하다 2006년 화랑대역사(驛舍)가 일제강점기 건립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며 보존돼왔다. 그러다 2010년 12월 여객 취급 중지 및 간이역으로 격하되고 경춘선 복선 전철화로 역 기능이 쇠퇴하면서 폐역 수순을 밟았다.
    지금은 폐철로가 됐지만 경춘선 철로가 놓인 사연은 특별하다. 조선총독부가 강원도청을 춘천에서 철원으로 옮기려 하자 도청을 지키기 위해 춘천의 부자들이 사비를 털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철도였다. 화랑대역은 서울 성북역(현 광운대역)에서 춘천역까지 이어진 경춘선 노선 중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으로 자리를 지켜오다 철도공원으로 재탄생했다. 퇴역 후 쓸모를 제대로 찾은 셈이다.
    인적 드문 날이 더 많았던 서울 변두리 역사는 공원 조성과 함께 ‘화랑대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비대칭 삼각형 박공지붕 형태의 아담한 건물은 최대한 원형을 지키면서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했다. 옛 대합실에 들어서면 경춘선과 화랑대역의 역사(歷史)가 한눈에 펼쳐진다. 화랑대역 연대기부터 마지막 역장 이야기와 기록물, 화랑대역 관련 기증품 등을 구경하다보면 시간을 되돌린 듯하다. 장년층 이상이라면 기차표 등 전시품 하나하나가 추억을 불러올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전시물은 열차 진출입을 신호기로 제어하는 ‘폐색기 체험’이다. 아이들은 진짜 역무원이 된 듯 색깔 버튼을 조작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실제 기차 좌석처럼 꾸민 전시관 안쪽의 영상 관람석은 중장년층이 더 좋아한다. 자리에 앉으면 영상과 함께 기차 여행이 시작된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 관람이다.

 
左.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옛 경춘선 폐철길은 힐링 산책로인 ‘경춘선숲길’이 됐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右. 일몰 30분 전부터 밤 10시까지 노원불빛정원으로 변신하는 화랑대철도공원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해 진 뒤엔 노원불빛정원으로 변신
    화랑대철도공원은 해가 뉘엿뉘엿 질쯤 ‘노원불빛정원’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마치 마법처럼 과거를 품은 화랑대역사 전시관 외벽이 미디어아트쇼가 펼쳐지는 스크린으로 변신하는 시간이다. 공원 바닥은 형형색색의 조명쇼가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발광다이오드(LED) 조형물, 미디어 영상을 상영하는 미디어 트레인 등 야간 경관조형물들이 400여m 구간을 화려한 불빛으로 물들인다.
    노원불빛정원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공원 입구 ‘비밀의 화원’부터 시작하자. 음악과 함께 색색으로 변하는 불빛 터널을 지나면 음악 정원, 불빛 화원, 하늘빛 정원 등이 이어진다. 경춘선 철길 건너편엔 숲속동물나라, 반딧불정원 등이 있다.
    관람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3차원(3D) 기차놀이터는 어린이들의 천국. 화랑대역사 전시관 부근 높이 7m, 너비 10m의 대형 꽃나무 조형물 ‘아바타 트리’도 볼거리다. 40개의 조명 장치가 더해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원불빛정원은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일몰 30분 전부터 밤 10시까지 무료 관람이다.
시간의 소중함 깨닫는 타임뮤지엄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화랑대철도공원엔 이색 즐길거리가 기차처럼 줄줄이 이어진다. 철로 한가운데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궁화호 열차는 퇴역한 무궁화호 열차를 활용한 타임뮤지엄이다. 객실 6량은 시간여행을 주제로, 다시 인류, 예술, 울림, 나눔 등으로 꾸몄다.
    열차표 모양의 입장권(성인 6000원·청소년 4000원·아동 2000원)을 끊으면 입장할 때 옛날 방식대로 펀치로 표에 구멍을 뚫어준다. 시간의 탄생부터 아인슈타인의 시간, 예술로 승화시킨 중세의 시간, 현대 작가의 시간 등을 전시품으로 풀어낸 공간이다. 전시한 시계만 95점에 이른다. 마지막 시간의 나눔관에서는 남은 인생에서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주는 ‘시간계산기’가 기다린다. 한정된 시간이 계산기에 구체적인 숫자로 나타나는 순간 관람객들의 표정이 달라진다. 30년 뒤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생사진관’도 있다.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입장마감은 오후 6시) 운영한다.

 
무궁화호 열차를 개조해 시간 박물관으로 꾸민 ‘타임뮤지엄’의 시계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화랑대역사관 옆 카페 기차가 있는 풍경도 지나칠 수 없다. 커피 등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면 미니 기차가 음료를 배달해준다. 미니 기차는 카페 창가를 두른 레일을 따라 칙칙폭폭 소리에 경적까지 울리며 음료를 싣고 온다. 카페 한쪽에서는 천장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명절 당일은 휴무이며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정오부터 밤 10시까지 운영한다.
    노원기차마을 스위스관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기차마을을 정교한 축소 모형으로 재현해놓았다. 4.4m 크기의 알프스 마터호른산 모형을 중심으로 융프라우와 몽블랑산 모형이 제법 실감나게 펼쳐진다. 그 사이를 17대의 모형기차가 쉬지 않고 달리는데 10분 간격으로 조명이 들어와 스위스 기차마을의 낮과 밤 풍경을 번갈아 감상할 수 있다. 노원기차마을 스위스관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입장마감은 오후 6시) 운영한다. 관람료는 성인 2000원, 청소년 및 어린이 1000원. 명절 당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다.
    밤 10시가 되면 화려한 불빛들은 사라지고 화랑대철도공원엔 어둠이 내린다. 양팔을 벌리고 외줄타기하듯 철로를 걸어나오는 길. 문득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경춘선 열차에 올랐던 그때 그 시절, 청춘의 시간들이 등 뒤에서 배웅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