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신라 범종이 출토된 운천동 절터 1부
'다시 찾은 보물-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1-1. 신라 범종이 출토된 운천동 절터
물길을 따라 역사는 흐르고 산은 역사를 품는다. 무심천이 청주 원도심의 역사를 말해준다면 미호강은 청주 역사의 산파이며 든든한 뒷심이다. 초기 국가로 탄생하는 마한의 세력이 미호강 언저리에서 성장하여 물길을 따라 점차 성안길에 이르렀다. 성안길의 원도심이 청주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기 전에 시내 중심을 가르며 유유히 흐르는 무심천 서편의 사직동에서 운천동을 거쳐 신봉동, 송절동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고대와 중세의 문화가 꽃피고 무르익었다. 그리고 바통을 읍성이 있었던 원도심으로 넘겼다. 무심천이 하류로 향하는 지점의 운천동은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가 있어 유명해졌지만 이것만이 아니었다. 보물로 지정된 신라 범종이 출토되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신라 사적비가 발견되었으며, 장신의 어른보다 세 배나 큰 고려 불상들이 여기저기 쓰러지고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인근 송절동 테크노폴리스 단지에서는 백제의 주거지 5백여 기가 발굴되었고, 신봉동에는 백제고분군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무심천 건너편에는 어느 정치집단의 본거지였던 정북동 토성이 온전하게 남아 그 시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운천동



운천동 무심천 도로변에 소재한 ‘절터공원 놀이터’는 주민들에게조차 다소 생소한 이름이 붙은 공터로서 말이 공원이지 근처 주민 외에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들어가 둘러보면 입구에 작은 표석이 하나 있어 옛 절터의 내력을 알려준다. 비석에 밝히지는 않았지만 비문은 내가 짓고 글씨는 도암 박수훈 선생이 썼다. 이곳은 바로 보물 제1167호 동종이 출토된 신라의 절터이다. 그 절의 이름은 구양사(句陽寺)였다. 절은 이미 6백 년 전에 없어지고 동종이 발견된 1970년대의 모습도 1984년에 청주에서는 처음으로 시작된 택지개발로 인해 지금은 전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대학 시절 이곳에 간혹 들러 절터에 굴러다니는 기왓장을 수집하기도 했는데 후에 이곳을 직접 발굴하는 인연을 맺기도 하여 지금도 이곳을 지날 때면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된다. 이제 40년이 넘은 기억을 되살려 이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기억은 기록으로써 역사에 남기 때문이다.
운천동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청주군 서주내면의 운천리와 연당리, 산직리, 하봉리, 사창리의 각 일부와 북주내면의 외덕리 일부를 병합하여 운천리라 하여 사주면에 편입되었는데, 이때의 운천리는 지금의 사직1동에 해당한다. 정확하게 경계선을 긋기는 어려우나 지금의 사직대로 북쪽의 주택지역으로 사직동 용화사에서 변전소 일대까지를 아우르는 마을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재개발이 시작되었거나 추진되고 있다. 운천리라는 지명도 ‘큰 우물’이 변하여 ‘구루물’이 되고 이를 다시 한자로 표기하여 ‘운천(雲泉)’이 된 것인데, 이 ‘구루물’이라는 우물도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사직1동 247-1번지 부강아파트 주차장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현재 운천동 주민들이 ‘구루물’이라는 옛 지명을 각종 프로그램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 좀 애매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운천동의 어원임이 분명하니 또한 쓰지 않을 이유도 없다고 하겠다. 이 일대가 사직동으로 바뀐 것은 1963년으로 사창리의 동쪽 부분과 운천리를 합하여 사직단이 있던 곳이므로 사직동이라 하였다.
지금은 사직1동이 된 옛 운천리에는 조선 후기의 지도에도 노천에 방치된 불상들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불교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렇게 방치되었던 7구의 불상들을 한 곳으로 옮겨 절을 창건한 것이 곧 지금의 용화사이다. 고종이 말년에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하였던 엄귀비가 어느 날 꿈을 꾸는데 부처님이 나타나 내가 지금 청주 무심천변 늪지에 묻혀 있으니 나를 위해서 사찰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놀라서 잠을 깬 엄귀비가 고종 황제에게 말하니 고종은 청주에 그러한 불상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명하였다. 당시의 청주군수 이희복(李熙復)은 어명을 받고 현지를 조사해 보니 과연 운천리 일대에 거대한 불상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다. 어떤 불상은 옆으로 누워 있었고 낚시꾼들이 그 부처님 어깨에 걸터앉아 고기를 낚는 낚시터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엄귀비가 궁중의 살림에 쓰기 위해 모아둔 내탕금(內帑金)을 내리어 절을 짓게 하였고, 이희복 군수는 상당산성 안에 있는 보국사(輔國寺)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용화사라 하였다. 용화사에 봉안된 7불은 이렇게 엄귀비의 현몽으로 이곳에 옮겨진 것이다. 얼핏 전설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모든 게 정확한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운천동 산직말에 사시던 한학자로서 청주향교 전교를 지내기도 한 유만기 옹이 생전에 나에게 들려주신 이야기에 따르면 운천동에는 팔만구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설마 이곳에 8만 개의 사찰이 있을 수 없겠지만, 숫자보다는 그 정도로 절이 많았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리고 실제 운천동 일대에 많은 절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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