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반짇고리
'글.박종희'

오늘 같은 날이 올 줄도 모르고, 버릴 요량으로 마음에 저울질하던 것이 몇 번이던가. 딸애의 원피스 밑단을 손질하려고 반짇고리를 꺼냈다. 옛날 어머니들의 장롱에나 어울릴 듯한 사각의 반짇고리는 색 하나 바래지 않았다. 무수한 세월이 흘렀지만. 주홍색과 청색이 어울려 만든 고상한 무늬는 여전했다.
이게, 얼마 만인가. 어두운 장롱 구석에 갇힌 반짇고리를 1년에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웬만한 것들은 수선집에 보내니 말이다.
평소엔 눈길도 안 주다가 갑자기 아는 척을 해서인지 입을 굳게 다문 문고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리마저도 예스러운 매듭으로 처리했는데 콩 알 만한 매듭을 풀지 못해 한참 실랑이했다.





어렵게 뚜껑을 여니 색색들이 실이 감겨 있는 실패가 화사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겉모습처럼 내용물도 바뀐 것이 없다. 금박지에 곱게 싸여 있는 바늘 쌈지, 골무와 가위도 크고 작은 단추가 담긴 봉지도 그대로다. 모두가 36년 전 직장 동료가 결혼 선물로 가져온 그 모습인데 반짇고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주인 여자의 얼굴만 변했다. 바느질하면서 늙어가는 모습도 지켜보라고 그런 건지 반짇고리 안쪽에 달린 작은 거울엔 새댁이 아닌 낯선 중년 여자가 앉아 있다.
원피스가 청색이라 군청색 실을 바늘귀에 꿰려고 하니 도무지 실이 꿰어지지 않는다. 실을 가지고 애쓰는 모습을 보던 딸애가 달라고 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실을 꿰놓는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싶어 돋보기를 들고 바늘을 보니 선명하게 잘도 보인다.
마흔이 넘으면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더니 라식 수술을 한 후 눈에 대한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내게도 올 것이 온 것 같다. 요즘 들어 부쩍 눈이 침침해지고 가까이 있는 글자는 보기가 어려워져서 돋보기를 책상 위에 두고 산다.
밑단을 시침질로 처리하고 허리 부분에 단추 하나 옮겨 다는 쉬운 일이지만 분홍빛이 도는 가죽 골무를 끼워본다. 반짇고리 안의 장식품쯤으로 여기곤 한 번도 만져보지 않아 투박하고 손에 설겠다 싶던 생각과는 달리 손에 끼니 의외로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다. 처음 끼어보는 골무의 신기함과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며 골무를 낀 손가락으로 바늘귀를 누른다. 제법 바느질하는 여인의 테가 나는지 거울 안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외할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분이셨다. 꼼꼼하고 여문 손끝이 소문나 마을에 바느질거리는 외할머니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늘 바느질하시던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앉은뱅이 재봉틀과 돋보기안경이 먼저 떠오른다. 도수 높은 돋보기안경을 콧등까지 내려쓰고 손녀들의 몸매를 아름 재서 한나절이면 원피스 하나를 만들어내는 외할머니는 마법사 같았다. 특별한 동작 없이 재봉틀 손잡이를 돌리며 이리저리 손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마치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른 것처럼 예쁜 옷이 생겨났다. 외저고리와 단치마는 물론이고 이불보, 횃댓보, 버선 등 자투리 옷감도 할머니 손에만 들어가면 훌륭한 것들이 만들어졌다.
어느 집이나 안방의 보료 옆에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반짇고리가 우리 눈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요즘은 전화 한 통이면 세탁소에서 달려오고 새 옷처럼 리폼해 주는 수선집도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 바느질 도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반짇고리의 부재를 잊고 살았는데 딸애의 원피스 덕분에 우리 집 반짇고리도 오랜만에 제 역할을 하며 호사를 누린다.





단추를 달고 매듭짓는 모습을 지켜보던 딸애가 옆에 붙어 앉아 바느질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바느질하고 싶어 외할머니를 조르던 것처럼 딸애도 바느질하는 내 손이 신기한 모양이다.
외할머니의 솜씨를 물려받은 친정어머니도 바느질 솜씨가 좋았다. 그 때문인지 나도 바느질엔 재주가 있었다. 학창 시절 가사 시간엔 선생님의 칭찬을 많이 들어 딸아이도 바느질을 잘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빗나갔다.
딸은 어머니의 시간을 먹고 자란다고 하는데 딸애를 보면 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딸애는 바느질엔 영 소질이 없다. 아니, 젬병이라고 해야 맞지 싶다. 바늘을 어떻게 잡는지도 모르고 가장 기본인 휘갑치기도 할 줄 모르는 딸애는 기술 시간이면 바느질 잘하는 친구가 가장 부러웠다고 한다. 어릴 때 원피스도 만들어 입히고 작아진 바지 단을 늘리는 것도 수시로 봤을 텐데 말이다.
예전엔 요강과 함께 빠지지 않던 반짇고리가 요즘 신부들의 혼수품 속에도 따라가는지 모르겠다. 세월이 좋아지다 보니 옛것들은 이제 그리움으로만 남는다. 긴 겨울밤 아랫목에 둘러앉아 양말과 내복을 기우며 바느질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더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언제 또 반짇고리의 문을 열게 될지 나 또한 기약이 없지만, 오랜만에 꺼낸 반짇고리를 소중한 보물 다루듯 정돈해서 있던 제자리에 놓는다. 오늘밤은 반짇고리 안에서도 도란도란 가족회의가 일어날 것만 같다.

EDITOR 편집팀
박종희 작가
이메일 : essay0228@hanmail.net
2000년 『월간문학세계』수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전국시흥문학상, 매월당 문학상, 김포문학상
2015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제1회 119 문화상 소설 최우수상 수상 외 다수
2008년 ~ 2019년까지 중부매일, 충북일보, 충청매일에 수필 연재
저서: 수필집 『가리개』『출가』
한국작가회의, 한국산문작가협회, 충북작가회의 회원
청주시, 세종시 수필창작 강사. 충북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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