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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상 두 번 수상한 황병준 레코딩 엔지니어
'연주자의 성격 음악에 다 드러나 “K-팝 오래가려면 음질에 더 투자해야”'

2월 4일은 음악계 잔칫날이 될 예정이다. 바로 ‘그래미상(Grammy Awards) 시상식’이 열리는 날이다. 1959년 시작된 그래미상은 빌보드 뮤직 어워드(BBMAs),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s)와 함께 미국에서 ‘3대 음악상’으로 꼽힌다. 그래미상 시상식이 열리는 날은 미국 음악계에서 ‘가장 성대한 밤(Biggest night)’이라 불린다.
그래미상은 업계 종사자들이 음악성과 완성도를 기준으로 판단해 투표로 수상자를 결정한다. 팬 투표나 음반 판매량 등 대중적 인지도가 크게 작용하는 나머지 두 상과는 다르다.
한국인 중 그래미상 최초 수상자는 소프라노 조수미다. 조수미는 1993년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와 녹음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여인’으로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 ‘최고 음반상’을 수상했다. 그다음 한국인 수상자가 바로 레코딩 엔지니어인 황병준(57) 사운드미러코리아 대표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사운드미러 코리아에서 황병준 레코딩 엔지니어를 만났다. (사진. C영상미디어)



황 대표는 그래미상을 두 번 받았다. 미국 작곡가 로버트 알드리지의 오페라 ‘엘머 갠트리’를 담은 음반으로 2012년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 ‘최고 기술상’을 받았다. 2016년에는 찰스 브러피가 지휘하고 캔자스시티합창단과 피닉스합창단이 부른 라흐마니노프의 ‘베스퍼스: 올 나이트 비질(철야기도)’로 ‘최우수 합창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했다.
레코딩 엔지니어가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다. 레코딩, 믹싱과 에디팅, 마스터링이다. 레코딩은 뮤지션의 연주를 녹음하는 것이다. 믹싱과 에디팅은 녹음한 연주 중 최상의 것을 골라 편집하는 단계다. 마스터링은 음반에 실릴 곡들을 조화롭게 다듬는 작업이다.
1월 12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사운드미러코리아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음악 작업을 하는 공간은 조용했다. 찬찬히 둘러보니 스피커와 의자, 컴퓨터 모니터 등 최소한의 가구만 들어서 있다. 소음을 없애기 위해 컴퓨터 본체까지도 작업실 밖으로 빼놓았을 정도다.
이 공간에서 매일 작업을 하나?
그렇다. 2000년 이곳에서 사운드미러코리아를 설립했으니 24년째다. 마스터링 작업의 경우 매일 한 작품씩은 한다.
그래미상을 두 번 받았다. 그래미상 수상자는 어떻게 선정하나?
그래미상을 수여하는 미국 레코딩 예술·과학 아카데미(NARAs) 회원 중 투표권이 있는 회원 1만 1000여 명이 투표로 뽑는다. 1차 투표로 후보를 선정한 다음 2차 투표로 최종 수상자를 선정한다.
일단 미국에서 나온 음반에 참여한 이력이 있어야 한다. 기존 회원의 추천도 필요하다. 가수와 작사·작곡가는 물론 지휘자, 엔지니어, 프로듀서, 연주자, 편곡자, 뮤직비디오 촬영 기술자도 소속돼 있다.
상금도 있나?
없다. 후보에 오르면 증서와 메달을 준다. 최종 결과는 시상식장에서 발표하는 순간까지도 모른다. 수상을 하면 그라모폰(축음기) 모양의 트로피를 받는데 당일엔 트로피에 수상자 이름이 안 적혀 있다. 시상식 후 이름을 새겨서 보내준다.

황병준 사운드미러코리아 대표가 2016년 수상한 ‘최우수 합창 퍼포먼스’ 부문 그래미상의 트로피. (사진. C영상미디어)



그래미상을 받은 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일할 때 더 편해졌다. 뮤지션 측이 내 의견을 더 신뢰하고 존중하는 느낌이다. 창의적인 일을 할 때 의견이 부딪히면 힘들다. 의사가 잘 조화되면 시너지가 생겨 정말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2016년 ‘베스퍼스: 올 나이트 비질(철야기도)’ 합창으로 그래미상을 받았다. 녹음할 때 현장에서 좋은 음반이 나오겠다는 느낌을 받았나?
물론이다. 마지막에 화음이 이어지다 굉장히 작은 소리가 돼 사라질 때 사운드가 붕 뜨는 것처럼 몰입감이 느껴졌다. 스태프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나왔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들은 가끔 지휘하다 졸도를 한다. 지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탈리아의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처럼 말이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너무 흥분해서 쓰러진다. 절정을 느끼는 거다.
지휘자 자리에서 연주를 직접 들으면 정말 좋다. 지휘자가 전체 연주의 뉘앙스나 균형을 조절하지 않나. 그 자리를 기준으로 음악을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실황녹음할 때 지휘자 머리 위쪽에 가장 중요한 마이크들이 있는 이유다.
황 대표는 원래 공학도였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진로를 확 틀었다.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오디오 리서치(IAR)에서 레코딩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후 1995년 버클리음대로 옮겨 뮤지컬프로덕션&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버클리음대를 다니며 녹음스튜디오 사운드미러에서 일했다. 사운드미러는 세계 최정상급 클래식 음반 엔지니어인 존 뉴턴이 세운 스튜디오다. 사운드미러가 작업한 수많은 앨범 중 여러 음반이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고 최종 수상하기도 했다. 황 대표는 그곳에서 존 뉴턴과 함께 일하며 레코딩 엔지니어링의 실무를 배웠다.
왜 진로를 틀었나?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어떻게 하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늘 압박감을 느꼈다.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면서도 같은 고민을 했다. 미국에 와보니 완전 다르더라. 젊은이들이 자신만의 소박한 꿈을 추구하며 사는 걸 보고 굉장히 충격받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생각을 많이 했다. 신학을 공부할까 의대를 갈까 고민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은 음악을 듣고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거였다. 그래서 레코딩 엔지니어의 길을 택했다.
원래 음악을 좋아했나?
어릴 때 외갓집에 전축이 있었다. 이모가 피아노를 전공한 클래식 마니아였다.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을 듣고 중학교 때부터 외삼촌을 따라 음악감상실에 다녔다. 항상 음악에 둘러싸여서 살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결정적으로 귀가 트이는 경험을 했다.
어떤 경험이었나?
음악 선생님이 좀 특이한 분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번호, 악장, 주제까지 다 외우게 했다. 학생들 사이에 시험 대비용 불법복제 테이프가 돌 정도였다. 나는 ‘베토벤 교향곡’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들었다. 100번쯤 들었을까. ‘베토벤 교향곡 5번 3악장’을 듣는데 귀가 트이는 경험을 했다. ‘정말 위대한 음악이구나’하는 감동이 가슴 깊숙이 꽂히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베토벤 음악을 엄청 들었다.
클래식 마니아라고 해도 전공으로 음악을 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
버클리음대는 전공을 불문하고 모든 학생을 2년간은 음악인으로 살게 한다. 화성법, 대위법 같은 음악 이론도 공부하고 악기를 하나씩 선택해 연주하게 한다. 입학 후 1년이 지나야 전공 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 공부하며 틈나는 대로 일했다. 보스턴에 있는 방송국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뉴포트 뮤직 페스티벌이 열리면 음악 스태프로 일하고 지역의 오케스트라 음반 녹음작업에도 참여했다. 학교 추천으로 사운드미러에서 일하게 됐다. 사부인 존 뉴턴은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클라우디오 아바도, 요요마, 오자와 세이지 등 그야말로 클래식의 전설들과 앨범 작업을 했다.
전설들과 함께 일할 기회는 없었나?
이탈리아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가 미국에서 오페라 데뷔를 할 때 녹음에 참여했다. 보첼리가 시각장애인이어서 오페라 공연 동선을 감지할 수 있게 무대에 안내판을 설치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독일 태생의 미국 지휘자 겸 작곡가인 앙드레 프레빈과도 작업을 했다. 길에서 마주치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평범한 외모다. 연주하면 완전히 달라진다.
연주를 많이 들으면 연주자의 수준을 알 수 있나?
그렇게 된다. 중요한 건 음악적인 수준과 성향은 자신이 지금 듣고 있는 음악에 쉽게 동화된다는 거다. 수준이 낮은 음악을 많이 들으면 그게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좋은 걸 들으면 기준이 높아진다. 수준을 유지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 좋은 걸 자꾸 들어야 된다. 연주에서 연주자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레코딩 작업을 할 때 뮤지션과 의견이 안 맞을 때도 있겠다. 고수하는 원칙이 있다면?
연주자가 지나치게 힘을 주면 조심스럽게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연주자의 전부라면 바꿀 수 없다. 젊었을 때는 내 생각대로 바꾸려고 하다 많이 싸우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고수하는 원칙은 클래식이나 재즈, 국악 모두 원칙적으로 음의 높낮이를 교정해주거나 하지 않는다. 한 군데를 바꾸면 다른 곳이 덜 완벽하게 들리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어색해진다. 그래서 전체를 다 바꿀 수밖에 없어진다. 마리아 칼라스 노래를 들어보면 음정이 틀려도 좋지 않나. 그걸 기계로 고쳐놓으면 오히려 이상해진다.
그는 2011년 송광사 새벽예불을 녹음해 음반으로 냈다. 레코딩 엔지니어를 넘어 음반 프로듀서 역할을 한 이 음반은 발매 당시 화제가 됐다.
송광사 새벽예불을 음반에 담을 생각을 어떻게 했나?
한국에 돌아와 현장에서 국악을 들어보니 정말 좋더라. 송광사에 가서 새벽예불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송광사 예불은 악보도 없이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음악이다. 서양에서는 인위적으로 음색을 똑같이 맞춰 부른다. 그런데 스님들이 제각각의 음색으로 부르는데도 너무 좋았다. 동양 음악과 서양 음악의 차이인 것 같다. 음반으로 제작했더니 외국인들이 듣고 놀라더라. ‘한국의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하더라. 그래미 쪽에서도 굉장히 반응이 좋았다. 음반을 낸 후 “왜 이런 음반을 계속 제작하지 않냐”, “계속해라”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레코딩 엔지니어로서 본 K-팝은 어떤가?
K-팝이 오래가는 음악이 될 수 있을까? 한 세대가 지나도 사람들이 계속 들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질을 높이는 데 좀 더 투자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 소리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 유명 공연장에 가보면 연주홀보다 로비를 더 잘 꾸며놓은 경우가 많다.
레코딩 엔지니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일을 하면 매일 음악을 최소한 8시간씩은 들어야 한다. 레코딩 엔지니어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매일 3시간 동안 음악을 듣고 일지를 써보라고 한다. 두 달치를 써서 가져오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못 가져오더라. 음악을 즐겨 듣는 것도 재주다. 내가 이 일에 재능이 있는지 알고 싶으면 음악을 계속 들으면서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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