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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선박 개발’ 한길 특허만 40개 “K-조선 1위 사수를 위해”
'2023 여성과학기술인상 김희정 시니어엔지니어'

‘호황은 짧고 불황은 길다.’ 조선업의 순환주기를 요약한 말이다. 호황기에 선박 발주가 몰리더라도 선박 수명이 25~30년인 만큼 곧 공급과잉으로 불황기가 온다. 세계 금융위기인 2009년부터 시작된 조선업계의 경기침체는 2020년까지 이어졌다. 조선업의 유능한 인재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조선소와 하청업계의 폐업이 이어졌다. 4년이 지난 2024년 조선업은 역대급 호황을 누리고 있다. 액화천연가스(이하 LNG) 선박, 암모니아선 등 친환경 선박 수주가 이어지고 있어서다.
24년 차 선박 엔지니어인 삼성중공업 선박해양연구센터 김희정 시니어엔지니어는 그동안 조선업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는 불황에도 호황에도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연구에 총력을 다한다. 오늘의 호황을 있게 한 ‘LNG 친환경 선박 수주’는 그가 오랜 기간 연구해온 분야였다. 24년 동안 오직 ‘선박 개발’에만 몰두해온 그는 매년 한 척 이상의 선박을 설계하고 시운전부터 성능 검증까지 총괄했다. 그가 국내에서 등록한 선박기술 개발 관련 특허만 40개가 넘는다.

2023년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인상을 받은 김희정 시니어엔지니어는 친환경 선박을 개발해 해외에서 LNG선 40척을 수주했고
매출 약 440억원 달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사진. C영상미디어)



김희정 시니어엔지니어는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현대중공업에서 5년간 근무했다. 대학 시절 김 시니어엔지니어의 동기 80명 중 여성은 단 두 명, 현대중공업 입사 당시 여성 신입은 그가 유일했다.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부산대에 돌아와 조선해양공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 조지메이슨대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쳤다. 한국에 돌아온 2010년부터는 삼성중공업 선박해양연구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2015년 대한민국 엔지니어상, 2017년 일본 조선학회 최우수논문상을 받았다. 그리고 2023년 여성과학기술인상을 받았다.
24년 동안 ‘선박 개발’이라는 한 우물을 팠다. 조선해양공학과 박사과정도 밟았다.
어릴 때부터 ‘큰 배를 만들어야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건 아니다(웃음). 다만 수학을 무척 좋아했고 문과보다는 이과 쪽 성향이어서 담임 선생님이 ‘이공계’로 가라고 권했다. 그중에서 고향인 부산에 있는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를 가게 됐다. 당시만 해도 조선 관련 전공을 하면 바로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막상 공부해보니 적성에 맞던가?
전공 공부는 아주 적성에 맞았다. 그런데 여중·여고를 나온 터라 70명이 넘는 남학생과 생활하는 게 쉽지 않더라. 동기 중에 여자 친구가 유일하게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결석한 날은 밥을 먹으러 가지도 못했다. 남자 동기들도 여학생이 너무 적다 보니 말을 거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지금 돌아보면 아쉬움이 크다.
입사했을 때 근무하는 층에 여직원용 화장실이 아예 없었다. 1층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한 것 말고는 특별히 불편했던 점은 없다. 다들 연구원으로 잘 대해줬고 무엇보다 선박해양 분야는 한국이 1등이니까 그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호황과 불황을 숱하게 겪었겠다.
입사해서 일을 시작하던 2000년대 초반은 조선업에서 2위였던 우리나라가 1위 일본을 따라잡은 시기였다. 판이 바뀌고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기술을 배워서 가져오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였는데 리더가 된 거다. 그 이후로는 우리가 계속 리드하고 있다. 조선 분야는 물론 상선 분야의 설계 제작에도 자부심이 있다. 물론 불황과 호황의 사이클이 있다. 사이클이 가파른 분야에는 우수한 인력이 잘 들어오질 않는다. 하지만 1위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우수한 인재가 확보돼야 한다. 중국 조선업이 자본력과 국가의 지원을 받아 ‘저가 전략’으로 나오고 있다. 2등이 넘볼 수 없는 ‘초격차’가 생기려면 우리만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

김희정 시니어엔지니어는 북극 얼음을 깨고 나아가는 쇄빙선을 개발해 한 달간 북극 항해에 참여한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사진. C영상미디어)



조선업의 전성기는 10년을 주기로 찾아왔다. 1980년대에는 인프라 구축으로 수출이 늘어났고 1990년대에는 일본에서 넘어온 일감들이 몰려들었다. 2000년대는 한국이 일본을 제치며 1위에 올라섰다. 2010년까지만 해도 국내 조선업은 ‘100억 달러 수출’을 기록할 정도로 전성기였다.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2014년 북극 쇄빙선을 수주한 적이 있다. 1.4m 두께의 북극 얼음을 깨고 운항하는 선박인데 실제로 잘 운항하는지 시운전을 해봐야 했다. 쇄빙선은 실제로 얼음을 깨면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북극에서 한 달 정도 지냈다.
북극 생활이 힘들진 않았나?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은 부모님께 맡기고 출장을 갔다. 출장에서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고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누구인가가 더 중요했다. 여성 엔지니어가 그 정도 책임지는 자리까지 갔던 경우가 드물었던 터라 책임감이 들었다.
해외 수주가 많아서 출장이 많았겠다.
배의 성능을 테스트하러 실제로 현지에 가는 경우가 많다. 자동차도 그렇지만 선박도 연료를 얼마나 소모하는가가 중요하다. 독일, 핀란드, 스웨덴 등에서 실험을 많이 했다. 2010년대 조선업이 한번 기울었던 이후로는 친환경 선박의 중요성이 대두했다.
친환경 선박 연구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선박 연비에 대한 고민은 오랜 기간 해왔다. 2000년 입사해서 그 이듬해부터 친환경 선박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각광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꾸준히 특허를 냈고 2015년 선박의 연비를 높이는 선형설계기술을 개발해 LNG선의 연비를 대폭 개선한 점을 인정받으면서 ‘대한민국 엔지니어상’을 받았다. 세계 해운업계의 환경 규제가 강화됐고 이 때문에 친환경 선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세계 각국에서 LNG, 메탄올, 청정수소 등 친환경 에너지로 추진하는 선박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조금 먼저 시작한 우리나라는 호재를 맞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친환경 선박 수주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게 알고보니 오랜 연구 덕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불황기에는 주목받지 못하던 분야였지만 꾸준히 연구하다보니 특허도 많이 낼 수 있었고 그런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더라.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친환경 선박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조선업도 흑자로 전환할 수 있었다.
조선업이 호황기인 요즘도 어려움이 있나?
인력난이다. 현장에서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꽤 됐다. 선박을 만드는 현장은 외국인 인력에 의지해 버티고 있다. 내국 인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위험하다. 호황에 기회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슈퍼사이클(초호황기)이 지난 후에도 10년, 20년 안정적으로 연구할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
현재 조선업의 ‘패스트 팔로워’는 중국이다. 국가적인 지원을 받으며 친환경 선박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투자 규모가 세계 1위다. 1등 국가인 한국의 인력을 섭외하는 데도 혈안이다.1위 자리 빼앗긴 후 절치부심하고 있는 일본도 있다. 2021년 해사산업강화법을 제정한 일본은 LNG 추진선 등 친환경 선박을 건조할 때 해운사와 조선소에 장기 저리 융자와 세제 혜택을 준다. 우리 정부는 2023년 12월 19일 '탄소중립기술특별위원회' 제8회 회의를 열고 “2030년까지 무탄소 선박을 상용화하고 친환경 선박 기자재 국산화율을 90% 이상 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어떻게 하면 인력난이 해소될 수 있을까?
순수과학이나 공학 쪽으로 사람이 덜 온다. 해양공학 쪽을 모집해도 전공자가 20%를 넘지 않고 연구직은 더욱 사람 구하기가 어렵다. 기술의 발전은 결국 사람이 한다. 그들이 이쪽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려면 과학과 공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경과 처우가 나아져야 한다. 특히 조선업은 경험이 중요하다. 경험이 쌓여야 다음 단계로 진보할 수 있다. 그런데 불황기에 인력들이 빠져나가면 그 경험이 함께 날아간다. 선주들이 선박에 대해 질문할 때 가장 정확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선박을 개발하고 만드는 데 참여한 엔지니어다. 호황을 맞으려면 불황을 버틸 힘이 필요하다.
2023년 여성과학기술인상을 받았다.
24년 전 연구원을 시작할 때 연구원 100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지금 연구소에는 단 두 명의 여성 시니어엔지니어가 있다. 자리를 잘 지켜서 이런 상을 받았구나 싶었다. 선례가 없다보니 좀 막막할 때가 있었다. 망망한 대해에서도 등대가 있으면 방향을 알 수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선례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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