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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가 암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좋을까, 모르는 것이 좋을까?

2023-04-07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의사가 알려주는 건강 이야기 (성인/노인)
암 환자가 암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좋을까, 모르는 것이 좋을까?
'환자 당사자의 의향을 아는 것이 중요'

    "선생님, 제발 저희 아버지께 암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 주세요!” 
    몇 달째 기침이 잦고 가끔 객혈도 있어 내원하신 72세 김 할아버지. 이어서 시행한 정밀 검사에서 폐암 3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내원하신 가족 분들은 행여 할아버지께서 암이라는 것을 아시면 삶에 대한 희망을 잃으실까 봐 담당 의사 선생님께 암 진단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치료할 수는 없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데요,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제가 있는 미국 뉴욕에서도 이런 환자 가족 분들을 가끔 만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앵글로 색슨계가 아닌 문화권에서 이런 경우가 좀 더 흔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가부장적 색채가 강한 문화권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환자의 동의하에 장남이 모든 대화의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암이라는 사실을 알면 향후 치료 과정에서 더 나쁜 영향을 끼칠까요?
    이와 관련하여 스페인에서 오래전 시행된 연구 결과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한 병원에서 97명의 암환자 분들을 인터뷰하여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군과 그렇지 않은 환자군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조사 결과 그중 66명이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들은 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중 57%에 달하는 38명은 자신의 병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중 절반이 넘는 54%에서 이미 자신이 암에 걸렸거나 치유가 불가능한 중병에 걸린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어서 각 환자군의 심리 상태, 치료에 대한 만족도 등을 심층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군에서 불안, 절망, 슬픔, 우울, 불면 등의 증상을 경험하는 정도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는 환자군에 비해 더 높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군이 가족 및 의료진과의 의사소통도 훨씬 원활하였으며 암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영향들을 가족 및 주변 사람들과 더 많이 나눌 수 있어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담당 의료진들과의 관계 형성도 더 잘할 수 있었고, 향후 치료 계획에 관한 이해도 역시 더 높았습니다. 또한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치료에 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병명과 예후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환자분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모르는 66명의 환자분 중 28명(42%)의 환자분들이 자신의 병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나이가 많을수록, 암 진단 후 기대 여명이 길수록(예후가 좋을수록), 그리고 여성일수록 더 강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환자분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만 조금씩,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소통이 좋습니다. 





    이제 앞서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암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환자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환자분의 감정 상태에 알맞은 정보 전달과 소통 방식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선, 환자분 당사자의 의향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병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고 싶은지, 어느 정도의 세부 사항까지 알고 싶은지, 만약 세세히 다 알고 싶지 않을 경우 누구를 통해 소통하면 좋을지 등을 물어보는 것은 완화의학 초진의 기본 질문 사항 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러한 대화가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대화는 아닙니다. 그리고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행여 오해를 살 수도 있지요. 그래서 권해드리는 방법은 건강할 때 본인의 의사를 주변 가족과 가까운 이들에게 알려두는 것입니다. 물론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수정하시면 됩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준비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웰다잉(well-dying)의 첫걸음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