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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 돌아오는 물길의 추억

2021-02-15

라이프가이드 여행


두물머리 정북토성 따라
새들 돌아오는 물길의 추억
'까치내 / 문암생태공원 / 신대교회'

    새들이 돌아오는 곳.  까치내에서는 먼 곳의 바람 냄새가 난다. 제 몸에 부리를 박고 잠드는 그 새들을 부른 건 어떤 그리움인가. 서로 다른 것들을 품어 안는 두물머리의 따스함. 갈대들의 노래가 지친 날개를 쓰다듬는다.
두물머리 하얀 까치의 전설 <까치내>
    새들이 돌아오는 즈음의 강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동이트기 전 가만가만 내쉰 두 물길의 날숨이 풀어져 몸을 섞는다. 물안개가 피는 아침 강의 풍경은 언어 저편에 존재한다. 허물 많은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갈대들. 안개가 더 멀리까지 퍼지면서 세상을 덮는다. 덮자고하면 못 덮을 허물이 있으랴.
 
까치내 습지


    까치내는 미호천과 무심천이 들판 한가운데서 만나 몸을 섞는 두물머리다. 한 물길은 멀리 음성, 진천, 증평, 오창, 팔결을 지나 왔고 또 한 물길은 청주를 가로질러 흘러왔다. 두 물길이 만나는 곳에는 사연이 깃들기 마련이다. 조선 헌종 때 상주 선비 이원조와 얽힌 이야기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이원조가 두물머리 주막에서 갑자기 병이 났다. 도사가 나타나 하얀 까치를 달여 먹이면 병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하얀까치는 예로부터 천년에 한번 나타난다는 길조이니 실현 불가능한 처방인 셈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서는 어렵고 힘든 과제일수록 흥미롭지 않은가.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까치내’라는 이름을 전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원조와 하얀 까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물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천렵을 하며 놀았다. 그들은 모두 이야기가 열어 보이는 상상의 세계를, 이야기의 꿈을 믿었던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작천鵲川은 ‘까치내’라는 이름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지금의 작천보에는 설화속의 하얀 까치 대신 철새들이 내려앉는다.



    살아가는 동안 한없는 흔들림을 느낄 때, 두 물이 합쳐지는 까치내 물가에 서보는 건 어떤가. 강물이 그렇듯 소리칠 땐 소리치고, 보내줄 건 보내주면서 다만 바다를 향해가는 꿈을 놓지 않으면 되리라.
    <까치내 (작천鵲川)> 까치내는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수하는 두물머리부터 시작해 신대들과 오창들을 가르며 흐르는 물길이다. 원평동, 신대동, 오창 신평리, 옥산 남촌리와 소로리의 젖줄 역할을 한다. 크게 보면 미호천 본류의 한 부분이지만 이 구간만을 가리켜 특별히 ‘까치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수변공원이 있는 작천보는 두물머리 합수지점에서 하류 방향으로 조금 떨어져 있다.
쓰레기 매립장의 아름다운 기적 <문암생태공원>
    어른이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기적을 믿지 않는다. 돌덩이를 금덩이로 만드는 연금술이나 호박을 황금마차로 만드는 마법의 주문 같은 건 세상에 없는 거라며 동화의 세계와 작별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을까.
    꽃들이 만발한 봄날, 쏟아지는 꽃비를 맞으며 문암생태공원에 가면 기적이라는 말을 되새김하게 된다. 소풍 나온 가족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환하게 웃으며 걷는 이곳이 20년 전만 해도 쓰레기 매립장이었다니. 봄에는 튤립, 가을엔 백일홍과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향기로운 이곳이, 온통 썩어가는 것들과 버려지는 것들의 역한 냄새로 애써 외면했던 장소였다니. 마녀의 저주가 풀린 동화 속의 공주가 따로 없다. 이 정도의 변신이라면 기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암생태공원의 아름다운 변신은 봄날의 소풍, 여름날의 물놀이, 가을의 습지와 수목원 산책에서 골고루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캠핑을 더한다면 밤하늘의 별빛처럼 오래 반짝이는 추억까지 덤으로 만들 수 있다. 운이 좋은 주말이면 공원에서 열리는 재즈콘서트를 즐기며 계절이 깊어가는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으리라.
    저주가 아름다운 기적으로 바뀐 공원을 걸으며 생각한다. 내마음의 악취 풍기는 것들, 욕심과 허영의 찌꺼기들을 애써 묻어둔 자리도 이토록 환해질 수 있다고. 기적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으키는 것이라고. 
믿음의 첫 물길을 내다 <신대교회>
    까치내를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강물은 유순하게 흐르며 들을 키웠고, 양지바른 물가에 마을이 돋아났다. 까치내 마을로 불리는 신대동이다. 예전에 신대마을 사람들은 큰 장을 보려면 청주장으로 올라갔고, 작은 장을 보려면 나루를 건너 오미장(옥산)으로 갔다 한다. 이야기는 그 시절 신대마을에 살았던 행상꾼들에게서 시작된다.
    가진 것 없는 사내들은 농한기가 되면 등짐을 지고 행상을 나갔다. 신대나루에서 배를 타고 미호천을 건너 진천, 죽산을 거쳐 대처로 훠이훠이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죽산에서 열린 사경회를 구경하다가 믿음의 마음을 얻었다. 이제 그들이 져야할 것은 행상봇짐만이 아니었다. 사내들은 평생 믿음의 십자가를 지고 첫 마음으로 살아갈 결심을 한다. 사내들의 이름은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신대마을로 돌아온 그들은 나루터 근처의 단골주막에 교회를 열었다. 광목천에 십자가와 태극기를 나란히 그려놓고 예배를 보니 호기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믿음의 홀씨는 조금씩 퍼져나갔다.



    충북에 개신교가 첫 뿌리가 내린 그때가 1901년. 주막교회에서는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막걸리도 마시고, 뱃노래 가락에 성경 말씀을 얹어 흥겹게 부르기도 했다. 자신들의 질박한 삶의 모습대로 복음을 전한 것이다. 복음이란 평안을 주는 기쁜 소식이 아닌가. 사납고 소란해진 마음에 한 줌의 평안을 얻고 싶다면 까치내 둑길을 따라가 신대교회를 만나보자.
    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1970년대에 지었다는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그곳에 깃들었던 누군가의 간절한 첫 마음이다.
    <신대교회> 초기 주막교회를 열었던 인물 중 오천보의 아내 이춘성은 평양여자신 학교로 유학을 다녀와 충청지역 전도의 주축이 되었다. 1970년대에 새로 지어진 신대교회 마당에는 ‘이춘성 전도부인 공덕비’와 ‘오을석 장로 추념비’가 놓여 있다. 충북의 첫 기독교전래지라 성지순례로 찾는 이들이많다. 현재 옛 건물은 비워두고 있기에 답사를 위해서는 전화문의가 필요하다. (청주시 흥덕구 미호로 373번길93-20 (신대동 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