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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주민들의 교류 공간이자 독립만세운동의 역사현장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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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주민들의 교류 공간이자 독립만세운동의 역사현장
'영덕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

    영해는 경북 영덕군의 9개 읍면 중 하나이다. 지금은 면소재지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작은 안동’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다. 영해3·18독립만세운동의 역사현장인 영덕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근대기의 영해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국가등록문화재가 즐비하다. 
‘작은 안동’으로도 불리던 영해도호부
    영해(寧海), ‘편안한 바다’라는 뜻의 지명이다. 지금은 경상북도 영덕군의 일개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영덕보다 훨씬 큰 고을이었다. 고려 충선왕 2년(1310)에 영해부로 시작된 영해도호부는 1413년부터 1895년까지 무려 482년 동안이나 존속되었다. 오늘날 영덕군의 북부 지역인 영해, 병곡, 축산, 창수 등 4개 면을 관장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영해장터거리와 영해면 소재지 전경. ‘ㅁ’자형 건물의 영해만세시장 뒤편에 너른 들녘과 동해가 보인다.


    1384년에 석성으로 축조된 영해읍성 안에는 영해부의 여러 관아건물이 자리 잡았다. 전성기에는 동헌, 객사, 작청, 대동청, 군기청 등 29동의 건물이 빼곡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영해읍성과 관아 건물은 일제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영해도호부의 영화와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것은 일부만 남은 영해읍성과 근래 복원된 책방관사뿐이다.
    영해면과 병곡면의 경계를 이루며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 주변에는 너른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드넓은 이 들녘이 영해도호부의 가장 든든한 경제 기반이었다. 대게, 미역, 멸치 등의 해산물도 풍부한 영해는 안동 등지의 경상도 내륙지방에 해산물을 공급하는 거점 역할도 수행했다. 그러다 보니 영해도호부의 관아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대규모 전통시장이 형성되었다. 끝수가 0, 5인 날에 열리는 영해장은 한때 동해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큰 오일장이었다. 지금도 적잖은 산물과 장꾼이 모여들어 활기가 넘친다.
    영해장터거리는 단순히 상업공간만은 아니었다. 주민들이 서로 대화와 마음을 나누는 교류의 장이자, 수천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현장이다. 1919년 3월 18일에 일어난 ‘영해 3·18독립만세운동’은 참여 인원만 3,000여 명에 이르고, 사망자가 8명, 부상자가 16명이나 발생했을 만큼 격렬했다. 영해 사람들의 항일정신은 오래전부터 남달랐다. 대한제국 말기에 평민 출신의병장으로 활동한 신돌석 장군의 주요 거점이 바로 영해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동부 지역이었다. 1878년 영해군 남면 북평리(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태어난 신돌석 장군은 19세 나이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며 신출귀몰한 전술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장군은 1908년에 현상금을 탐낸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01. 영해면 성내리 680번지에 남은 옛 영해읍성의 성벽    02.영해도호부의 관아 건물 중 유일하게 복원된 책방관사
03.축산면 도곡리 신돌석 장군 유적지 내충의사에 봉안된 신돌석 장군의 영정   04.구 영해금융조합의 벽면에 설치된 오르내리창과 맨위쪽의 치아 모양 장식


아름다운 미래를 준비하는 영해장터거리
    영덕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넓지 않다. 시점과 종점 간 거리가 400여 m에 불과한 공간 내에 영덕군의 국가등록문화재 13점 가운데 송천예배당을 제외한 12점이 분포한다. 느긋하게 걸어도 1~2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다. 영해읍성의 일부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성내리 680번지부터 들러본 뒤에 구 영해터미널을 찾았다.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이 건물은 1960년대까지 터미널로 활용됐다. 이후에 들어선 페인트 가게가 폐업한 지 오래된 탓에 폐가나 다름없이 있다가 근래 들어 대대적인 개보수공사가 시작됐다.
    구 영해터미널 옆에 위치한 영해양조장 및 사택은 양조장 2동, 사택 1동, 도정간 1동 등 모두 4개동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사택과 도정간은 1960년대 건물이며, 1910년대에 지어진 양조장 건물에서는 두어 해 전까지도 막걸리가 제조됐다. 지난해까지 50년 가까이 영해양조장을 운영했다는 신동준 씨는 “한창때는 한 말(20리터)짜리 통으로 하루 120개 넘게 나갔지만 폐업할 무렵에는 하루 대여섯 말밖에 안 나갔다”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해양조장에서 약 20m 거리에는 1935년에 건립된 구 영해금융조합 건물이 있다. 모더니즘 양식으로 건축된 이 건물은 좌우대칭 구조가 완벽하다. 건물 앞쪽에는 6개의 오르내리창이 설치됐고, 건물 맨 위쪽에는 치아 모양의 장식이 꾸며져 있어서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몇 해 전까지도 농협의 부속 건물로 활용됐지만, 지금은 모든 출입구가 봉쇄된 ‘유물’로 남았다. 

 
左) 지붕을 뚫고 올라온 듯한 2층이 특이한 구영해의용소방대 건물     右)영해면소재지 한복판에 세워진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기념탑


    구 영해금융조합 맞은편의 영해파출소 자리는 영해3·18독립만세운동 당시 조선인들을 탄압한 영해주재소가 들어섰던 곳이다. 근처의 구 영해의용소방대 건물은 현재 영해3·18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의 2층은 지붕 위에 망루처럼 우뚝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런 구조의 2층은 영해양조장과 영해장터거리 근대주택상가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해장터거리 근대상가주택1은 작은 대나무밭을 사이에 두고 구 영해의용소방대와 이웃해 있다. 1939년에 처음 지어진 근대상가 주택1에는 한때 푸줏간, 장터식당 등의 가게와 살림집이 한공간에 있었다. 이 상가주택에서 영해만세시장 입구까지 일직선으로 300m쯤 뻗은 예주2길이 한때 영해에서 가장 번화한 장터거리였지만 지금은 한산하다.
    예주2길에는 영해장터거리 근대상가주택1~5를 비롯해 구 영해공소, 구 영해언론인협회 및 구 대구매일신문 지국 등 국가등록문화재 7개소가 위치한다. 한때 소금가게와 이불가게가 들어섰던 근대상가주택5(원대종합설비) 이외의 건물은 현재 모두 문이 굳게 닫혔다. ‘신흥상회’로 처음 문을 열었다는 근대상가주택2도, 6.25전쟁 당시 인민군의 본부로 활용됐다는 근대상가주택4도 안쪽까지 둘러보기는 어렵다. 이 장터거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대대적인 개보수공사를 거쳐서 영해의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옛것과 새것이 적절히 조화된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아름다운 미래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