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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고刻苦의 담금질로 쇠뿔에 공예 예술의 극치를 새기다

2021-05-07

문화 문화놀이터


시대를 잇는 삶
각고刻苦의 담금질로 쇠뿔에 공예 예술의 극치를 새기다
'화각장 이수자 이종민'

    소박한 멋을 추구했던 조선시대 공예 가운데 유독 화려함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던 화각은 쇠뿔에 새긴 조각이다. 섬세하고 정교하기 그지 없는 공예 예술이 가진 절정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화각은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조재하는 희소성을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귀하디 귀한 화각의 명맥을 잇고자 인고의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각장 이종민 이수자는 가장 화려하고 독보적인 화각의 아름다움을 꽃피우기 위해 쉼 없는 담금질을 하고 있다.
    *우수 이수자는 2019년 무형문화재 전승체계의 바탕을 이루는 이수자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도입되었다. 3년 이상 활동한 이수자 중에서 무형문화재 전수교육 참여와 전승실적이 탁월한 사람을 추천받아 1년간 우수 이수자로 지원하고 있다. 이종민 이수자는 2019년에 우수 이수자로 선정되었다. 
가장 한국적인 화려함을 표현한 공예
    유일무이 한국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공예 예술의 아름다움을 담은 화각은 소재에서 제작방법에 이르기까지 차별화된 면모를 가진다. 화각은 예로부터 귀족이나 왕실의 애장품에 주로 이용됐을 만큼 귀하고 값진 공예로 나전칠기(螺鈿漆器)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고유의 전통 왕실 공예이다. 화각은 투명도가 높은 쇠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펴 각지(角紙)를 만든 다음, 뒷면에 오색찬란한 단청안료(丹靑顔料)로 갖가지 문양을 그리고 채색하여 만들고자 하는 목기물 백골(白骨) 표면에 붙여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섬세하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화각은 적·청·황·백·흑 등 오색을 기본으로 하여 비교적 명도가 높은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실내분위기를 화사하고 생기 있게 해주는 가구와 생활용품에 활용했다. 표면에 광택을 칠하여 채색이 잘 벗겨지지는 않지만 튼튼하지 못하여 보존이 어렵고 재료가 귀하며 공정이 까다로워 생산에 한계가 있어 귀족층들의 기호품이나 애장품으로 이용되었고 일반대중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희귀 공예품이다.
    조선시대에 전성기를 맞으면서 일부 계층으로부터 가장 소장하고 싶은 공예품으로 각광받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어 접하기도 쉽지 않고 명맥을 이어가는 이들도 극히 드물어 더욱 귀한 가치를 가지는 화각. 사라질 뻔한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인 화각에 일생을 바쳐 그 명맥을 이어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무형문화재 이재만 선생의 뒤를 이어 아들인 이종민 이수자가 현재 화각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보존과 전승의 가치가 높지만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작업 자체가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대를 이어 부자가 화각에 뛰어든 데에는 그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은 물론 이어나가야 할 귀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에 대해 책임감과 사명감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쇠뿔에 새기고 몸에 새겨 꽃피운 화각
    이수하려는 사람이 극히 드문 까닭에 외로운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종민 이수자는 태어나면서부터 화각과 함께해 몸에 자연스럽게 화각이 새겨졌다. 무형문화재인 아버지 이재만 선생이 늘 집안에서 화각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았고, 장난감처럼 화각 조각을 가지고 놀고, 도화지 대신 화각에 그림을 그리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에는 용돈벌이 삼아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며 화각 작업을 함께했다. 가장 기초이자 어렵고, 중요한 과정인 뿔을 굽는 것으로 화각에 입문해 쇠뿔과 친숙하고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러운 이끌림으로 본격적으로 화각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보고 자란 환경이 온통 화각이었으니 그 길을 걷는 게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섬세한 성향을 가지고 있고 그림도 좋아해 당연한 듯 화각을 하게 됐습니다. 평생 화각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고단하고 힘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이어가야 하고 다행스럽게도 제게 재능도 있는 덕분에 이수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화각은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견디며 작업해 화려한 문양과 색채가 더해졌을 때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누구보다 화각의 매력을 꿰뚫고 있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작업하게 된다는 게 저의 장점이자 숙명처럼 느껴집니다.”
 
(左) 갈고 다듬기를 반복하는 인고의 작업인 화각   (右) 반드시 전승해야 할 귀한 문화유산인 화각을 잇는 이종민 이수자

    모든 것이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특별히 화각은 길고 지난한 작업과정을 인내해야 하기에 훨씬 고단함이 느껴진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참고 기다리는 시간을 거듭하며 새기고 그리고 붙이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견뎌야 하며, 워낙 과정이 까다로워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수 개월이 소요되는 것은 기본이다. 규모 있는 가구의 경우 집중해서 제작해도 1년, 함 같은 경우 크기가 작더라도 2년 가까이 걸릴 정도로 섬세한 작품일 뿐더러 함 하나에 소 200마리에 해당하는 뿔이 들어갈 정도라 재료를 구하고 다듬는 데에도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야말로 인내를 거듭하며 뼈를 깎는 노력을 더해야 하는 공예가 바로 화각이다. 쇠뿔과 함께 고군분투하고 미적인 감각과 표현력을 더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인 화각이기에 본격적인 이수를 시작한 이후 이십여 년 남짓한 시간을 함께했지만 여전히 배우고 전수해야 할 것이 많다. 작품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할 정도라는 이종민 이수자는 새로운 시도로 화각의 폭과 가능성을 넓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가장 전통적인 공예 본연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집중
    다른 여러 전통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화각 역시 현대인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것이 전통을 이어가며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대화라는 작업과정을 적용하기에는 화각은 예외적인 요소가 많다. 반드시 투명도가 뛰어난 황소 뿔만 사용해야 하며, 특유의 문양과 색감이 전통적인 요소에서 벗어나면 은은한 아름다움과 기품이 빚어내는 화려함을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화려함과 섬세함이 아니라 화각이 가지는 은은함에서 발휘되는 고고한 기품을 표현하려면 반드시 전통적인 제작기법을 고수해야 하는 것이다.
 
01. 쇠뿔에 여러 가지 민화를 그려 조각을 맞추는 화각    02. 밑그림 위에 전통 안료로 채색하는 과정
03. 고급스러운 공예품으로 손꼽히는 화각으로 장식한 가구(사진. 이종민)    04. 화려하게 장식해 사대부가에서 즐겨 사용했던 사주함 (사진.이종민)

    “어느 정도 작업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니 화각과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림이 우리 고유의 색상과 정서를 담은 전통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방색이 들어가야 화각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화각의 독특한 질감과 형태를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결국 화각은 전통적인 요소의 어울림이 만드는 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전통 소재에 우리 전통 그림과 색채가 어우러져 화각의 아름다움이 승화되는 것이죠.” 
    어느 정도 경지에 닿으니 전통적인 요소들의 가치가 제대로 보인다는 이종민 이수자는 철저히 전통 방식을 고수하되 품목을 다양화하는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화각을 알고 느끼고 소유할 수 있게 하고자 보석함이나 거울, 필통, 향수병 등 전통의 가구류에서 벗어나 화각으로 만드는 소품에도 관심을 더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소품은 조각난 쇠뿔로도 만들 수 있어 귀한 재료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 의미가 있다.
    갈고 또 갈아 좋은 소재를 다듬고 섬세하게 그림을 그려 색을 입히는 등 총 36단계의 작업 과정을 거쳐야 하는 화각을 작업하는 것은 인고이고 극기이며, 다스림이라고 말하는 이종민 이수자는 그 시간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화각을 전승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