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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연도, 조선시대 효를 그리다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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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연도, 조선시대 효를 그리다
'신중엄(申仲淹, 1522~1604)의 80세를 축하하며 제작된 경수연도'
세종 13년(1431)에 편찬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정조 때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는 효자가 충신과 열녀를 제치고 가장 먼저 수록되었는데, 이는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효(孝)'를 모든 도리의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부모의 장수를 기뻐하며 축하 잔치를 베풀었던 '경수연(慶壽宴)'은 효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중 1601년 신중엄(申仲淹, 1522~1604)의 80세를 축하하며 제작된 경수연도(慶壽宴圖)를 소개한다.
80세 넘게 장수한 신중엄의 경수연과 일상
여러 명사의 시문과 명필가인 한호(韓濩, 1543~1605)와 허목(許穆, 1595~1682)의 글씨 그리고 잔치 장면인 <경수연도>를 함께 묶은 《경수도첩(慶壽圖帖)》은 17세기 사대부 집안의 효 실천을 잘 보여준다. 특히 네 장면의 <경수연도>는 경수연도 중 가장 오래된 원본으로 조선 중기 산수화풍을 대변해 준다. <경수연도>의 제작 배경과 화풍의 특징 그리고 어떤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중엄은 정유재란 중인 1598년 자신의 재산을 명나라 군사를 위해 사용했는데, 그 덕분에 80세인 1601년 국가로부터 가선대부 동지 중추부사 품계를 받았다. 이때 참판과 승지 등 높은 벼슬로 입신양명했던 효심 깊은 두 아들 신식(申湜, 1551~1623)과 신용(申湧, 1561~1631)은 80세 아버지를 위해 1601년 12월부터 1604년까지 여섯 차례 축하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이호민(李好閔, 1549~1627)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은 시문에서 신중엄의 경수연을 축하하는 임금의 은혜와 고령 신씨의 빛나는 가문 등을 찬양했다. 특히 두 아들의 효심에 관한 칭찬과 높은 벼슬은 물론이고 80세 넘게 장수하며 모든 복을 겸비한 신중엄을 축하했다. 그리고 네 장면의 <경수연도>에는 경수연이 거행되는 장면을 비롯해 한적한 노년을 보내는 신중엄의 일상이 담겨 있다. 각 폭의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화풍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광된 삶이 후손에게도 지속되길 바라며
먼저 1폭과 2폭은 상단 여백에 쓴 ‘서문구제(西門舊第)’를 통해 서대문 근처 신중엄 집에서 열린 잔치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그림 1). 두 작품은 배경 산수가 연결되어 한 장면처럼 보이나 주제는 각기 다르다. 그중 오른쪽의 1폭이 경수연이 거행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장면이다. 사랑채로 보이는 장소에 참석한 12명 중 한 명이 주인공인 신중엄에게 술잔을 올리고 있다. 전경에는 서대문으로 보이는 누각과 민가 등이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인 채 지붕만 드러나 있으며 중경에는 인왕산 아래 경수연이 열리는 신중엄의 저택을 반듯하면서 웅장하게 그려 강조했다.
집 뒤로 우뚝 솟은 소나무는 궁성의 우백호로 국운을 상징하는 인왕산과 신중엄의 저택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임금의 크나큰 관심과 은혜가 미친 신중엄의 영광이 후손에게도 지속되길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폭에는 후원의 누각에서 서화고동(書畵古董)에 몰두하는 신중엄의 편안한 일상을 담고 있다. 누각 주위에 배치된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 소나무, 매화 등 세한삼우(歲寒三友)와 태호석 등은 인생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굳건히 지조를 지켰던 신중엄의 한결같은 삶을 보여준다.
신선처럼 풍류를 즐기고 무병장수하길 빌며
3폭과 4폭은 상단 여백의 ‘용산강정(龍山江亭)’을 통해 현재 원효대교 근처인 용산강에서 이뤄진 모임 장면임을 알 수 있다(그림 2). 그중 오른쪽의 3폭은 뱃놀이 이후 소나무가 멋들어지게 늘어선 강가에서 풍류를 즐기는 모임이며 4폭은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강변의 정자에서 밤늦도록 향을 피우며 담소하는 장면이다. 경수연에 참석했던 이덕형(李德馨, 1561~1613) 등이 신중엄을 노선(老仙)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나 장수와 태평성세를 상징하는 남극(南極)노인에 비견했듯이 3폭과 4폭은 신선 같은 신중엄의 일상을 담고 있다. 벗들과 풍류를 즐기고 무병장수하길 기원하는 자식의 바람을 담아낸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만수무강을 기원
네 장면의 <경수연도>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윤의립(尹毅立, 1568∼1643)의 작품으로 전하나 산수와 인물 기법 등에서 그의 화풍과 차이를 보인다(참고 1). 그중 1폭과 2폭은 산수나 팔작지붕의 처마 등이 같은 솜씨로 그려져 동일 작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는 1602년 4월 두 번째 경수연에 참석했던 최립(1539∼1612)의 “(1601년) 경수연을 열었을 때부터 화원에게 당시의 일들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는 글에서도 확인된다. 임진왜란 이후 효행을 정치적인 교화 수단으로 중시했던 선조가 신중엄의 경수연에 술과 고기 등을 하사하면서 1폭에 그려진 악사를 비롯해 연회 장면을 그릴 화공까지 보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3폭과 4폭 역시 산수와 인물 표현 등이 동일해 1601년에서 160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폭과 2폭에는 원산에 짧은 선으로 질감을 나타내는 조선 전기의 안견화풍과 누정 앞의 거칠고 진한 바위 표현 등 중기화풍이 섞여 있으나 3폭과 4폭에는 흑백 대비가 심한 전경의 강변과 후경의 산수 표현 등 조선 중기 유행했던 산수화풍이 반영됐다. 특히 1·2폭과 확연히 다른 얼굴 형태와 굵은 먹선의 옷주름 등은 조선 중기 인물화를 잘 그렸던 전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탁족도(濯足圖)>의 인물과 유사해 흥미롭다(참고 2).
신중엄의 장수를 축하하는 <경수연도>는 조선 중기 산수화풍을 대변하면서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자식들의 효심에서 비롯되었으나, 임금의 은혜가 미친 아버지의 영광이 후손에게도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과 군자처럼 살아온 아버지를 존경하고 만수무강하길 기원하는 자식의 간절함이 담겼다. 신중엄의 <경수연도>는 현대사회의 효와 자녀 교육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80세 넘게 장수한 신중엄의 경수연과 일상
여러 명사의 시문과 명필가인 한호(韓濩, 1543~1605)와 허목(許穆, 1595~1682)의 글씨 그리고 잔치 장면인 <경수연도>를 함께 묶은 《경수도첩(慶壽圖帖)》은 17세기 사대부 집안의 효 실천을 잘 보여준다. 특히 네 장면의 <경수연도>는 경수연도 중 가장 오래된 원본으로 조선 중기 산수화풍을 대변해 준다. <경수연도>의 제작 배경과 화풍의 특징 그리고 어떤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중엄은 정유재란 중인 1598년 자신의 재산을 명나라 군사를 위해 사용했는데, 그 덕분에 80세인 1601년 국가로부터 가선대부 동지 중추부사 품계를 받았다. 이때 참판과 승지 등 높은 벼슬로 입신양명했던 효심 깊은 두 아들 신식(申湜, 1551~1623)과 신용(申湧, 1561~1631)은 80세 아버지를 위해 1601년 12월부터 1604년까지 여섯 차례 축하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이호민(李好閔, 1549~1627)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은 시문에서 신중엄의 경수연을 축하하는 임금의 은혜와 고령 신씨의 빛나는 가문 등을 찬양했다. 특히 두 아들의 효심에 관한 칭찬과 높은 벼슬은 물론이고 80세 넘게 장수하며 모든 복을 겸비한 신중엄을 축하했다. 그리고 네 장면의 <경수연도>에는 경수연이 거행되는 장면을 비롯해 한적한 노년을 보내는 신중엄의 일상이 담겨 있다. 각 폭의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화풍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광된 삶이 후손에게도 지속되길 바라며
먼저 1폭과 2폭은 상단 여백에 쓴 ‘서문구제(西門舊第)’를 통해 서대문 근처 신중엄 집에서 열린 잔치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그림 1). 두 작품은 배경 산수가 연결되어 한 장면처럼 보이나 주제는 각기 다르다. 그중 오른쪽의 1폭이 경수연이 거행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장면이다. 사랑채로 보이는 장소에 참석한 12명 중 한 명이 주인공인 신중엄에게 술잔을 올리고 있다. 전경에는 서대문으로 보이는 누각과 민가 등이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인 채 지붕만 드러나 있으며 중경에는 인왕산 아래 경수연이 열리는 신중엄의 저택을 반듯하면서 웅장하게 그려 강조했다.
집 뒤로 우뚝 솟은 소나무는 궁성의 우백호로 국운을 상징하는 인왕산과 신중엄의 저택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임금의 크나큰 관심과 은혜가 미친 신중엄의 영광이 후손에게도 지속되길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폭에는 후원의 누각에서 서화고동(書畵古董)에 몰두하는 신중엄의 편안한 일상을 담고 있다. 누각 주위에 배치된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 소나무, 매화 등 세한삼우(歲寒三友)와 태호석 등은 인생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굳건히 지조를 지켰던 신중엄의 한결같은 삶을 보여준다.
신선처럼 풍류를 즐기고 무병장수하길 빌며
3폭과 4폭은 상단 여백의 ‘용산강정(龍山江亭)’을 통해 현재 원효대교 근처인 용산강에서 이뤄진 모임 장면임을 알 수 있다(그림 2). 그중 오른쪽의 3폭은 뱃놀이 이후 소나무가 멋들어지게 늘어선 강가에서 풍류를 즐기는 모임이며 4폭은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강변의 정자에서 밤늦도록 향을 피우며 담소하는 장면이다. 경수연에 참석했던 이덕형(李德馨, 1561~1613) 등이 신중엄을 노선(老仙)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나 장수와 태평성세를 상징하는 남극(南極)노인에 비견했듯이 3폭과 4폭은 신선 같은 신중엄의 일상을 담고 있다. 벗들과 풍류를 즐기고 무병장수하길 기원하는 자식의 바람을 담아낸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만수무강을 기원
네 장면의 <경수연도>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윤의립(尹毅立, 1568∼1643)의 작품으로 전하나 산수와 인물 기법 등에서 그의 화풍과 차이를 보인다(참고 1). 그중 1폭과 2폭은 산수나 팔작지붕의 처마 등이 같은 솜씨로 그려져 동일 작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는 1602년 4월 두 번째 경수연에 참석했던 최립(1539∼1612)의 “(1601년) 경수연을 열었을 때부터 화원에게 당시의 일들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는 글에서도 확인된다. 임진왜란 이후 효행을 정치적인 교화 수단으로 중시했던 선조가 신중엄의 경수연에 술과 고기 등을 하사하면서 1폭에 그려진 악사를 비롯해 연회 장면을 그릴 화공까지 보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3폭과 4폭 역시 산수와 인물 표현 등이 동일해 1601년에서 160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폭과 2폭에는 원산에 짧은 선으로 질감을 나타내는 조선 전기의 안견화풍과 누정 앞의 거칠고 진한 바위 표현 등 중기화풍이 섞여 있으나 3폭과 4폭에는 흑백 대비가 심한 전경의 강변과 후경의 산수 표현 등 조선 중기 유행했던 산수화풍이 반영됐다. 특히 1·2폭과 확연히 다른 얼굴 형태와 굵은 먹선의 옷주름 등은 조선 중기 인물화를 잘 그렸던 전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탁족도(濯足圖)>의 인물과 유사해 흥미롭다(참고 2).
신중엄의 장수를 축하하는 <경수연도>는 조선 중기 산수화풍을 대변하면서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자식들의 효심에서 비롯되었으나, 임금의 은혜가 미친 아버지의 영광이 후손에게도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과 군자처럼 살아온 아버지를 존경하고 만수무강하길 기원하는 자식의 간절함이 담겼다. 신중엄의 <경수연도>는 현대사회의 효와 자녀 교육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